유채꽃 터널을 달리며 환상에 빠지다

제주 1112번 도로에서 정석비행장까지

등록 2005.04.20 13:34수정 2005.04.20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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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임

달력 위에 노란 꽃그림을 그리며

반쯤 열어 놓은 유리창 너머에선 꽃바람이 불고 있었다. 싱겁기도 하고 향긋하기도 한, 그래서 그 맛이 더욱 담백하다고나 할까.


김강임
누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4월의 달력 위에 빨강 꽃, 하얀 꽃, 분홍 꽃으로 색칠했던 꽃그림. 그 꽃그림이 오늘은 노란색 유채꽃을 그려 놓았다.

얼었던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생명의 순수함. 그 땅 위에 노랗게 크고 작은 지도를 그려 넣는 계절의 신비로움. 그것은 분명 '잔인함'이라기보다 '아름다움' 그 자체다.

김강임
제주의 4월은 유채꽃이 거리를 장식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길모퉁이 자투리땅에서부터 벌판, 그리고 바닷가의 한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공한지 땅이라면 어디든지 꽃씨를 뿌리는 제주사람들의 인심. 그래서 제주사람들에게 4월은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주의 4월은 바다까지 노랗게 물을 들이듯, 지천에 깔린 것이 유채꽃 물결이다.

김강임
1112번 도로 유채꽃터널을 달리며


제주시에서 동부관광도로를 타고 남조로에 이르자 산허리에는 신록이 피어나고 있었다. 연둣빛으로 피어나는 신록은 아마 머지않아 초록을 잉태할 것이다.

남조로에서 다시 1112번 도로로 이어지는 도로에 유채꽃 터널이 시작되었다. 어깨를 겨룬 오름 사이를 질주하듯 달려 보는 자유. 눈앞에 펼쳐지는 유채꽃 물결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김강임
겨울을 딛고 피어난 보리밭이 푸름을 안겨다 준다. 들녘의 어디에선가 아지랑이가 피어날 것 같은 착각. 야트막한 산등성이에는 봄 이야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운전대에 앉아있던 남편도 운전보다 주위 풍경에 흠뻑 빠져 있는 듯 하다.

"운전 조심하세요!"

오랜만에 마음의 여유를 얻고 달려보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나는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댔다.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인간의 감정에도 한계가 있나보다.

김강임
"마음으로 찍어보는 수정체가 더욱 아름다울 거야!" 남편은 내 마음의 티를 확인이라도 한 듯 은근슬쩍 충고한다.

계절을 만끽하며 들판을 누비던 말들도 오늘은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말 등에 올라타는 관광객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름 아래 펼쳐진 목장에는 활기가 넘쳐흐른다. 제주시에서 유채꽃 잔치가 열렸던 정석비행장까지는 50여분 정도. 마치 노란 선글라스를 낀 듯. 수정체의 각막도 모두 누렇게 물이 들었다.

김강임
자유 속에 현실을 걱정하는 사람들

"현실 속에서 너무 멀리 도피해온 것은 아닐까?"

환상의 드라이브 속에서 나는 현실을 걱정한다. 내 마음을 아는 듯, 구비마다 브레이크를 밟아보는 남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쫓기듯 살아가는 일상을 두고 뒤돌아 볼 겨를 없이 달려왔던 시간들. 어쩌면 자동차의 백미러로 비치는 풍경들이 우리가 걸어온 길은 아닐 런지.

김강임
허허벌판을 가로지르는 1112번 도로는 앞서가려 클랙슨을 눌러대는 사람도, 새치기를 하는 얌체 족속도 없다. 그저 물 흐르듯 마음의 여유를 두고 미끄러지는 사람들만이 이 드라이브 코스를 택한다.

그래서 1112번 도로는 어쩌면 한가하면서도 게으름이 피어나는 곳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 하다.

자동차에서 내려봤다. 봄빛에 얼굴이 따갑다. 엊그제까지도 더디 오는 봄을 탓하며 따뜻한 봄을 그리워했건만, 도로의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계절은 저만치 앞서 간다.

넘실대는 꽃 터널 속에서 자유가 주는 편안함을 만끽하면서도 미래를 설계하는 우리들의 마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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