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께서 누라니요. 천부당만부당 하신 말씀이오십니다. 오늘날 저희가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신 이도 어르신이요, 이만큼이나 복록을 누리도록 기르신 이도 어르신 아니십니까. 행여라도 그런 말씀일랑 마시오소서.”
권병무의 말에 오경석이 화들짝 놀라며 송구스러워 했다.
“그래 말이라도 고맙네. 경석이 자네 큰 아이가 세창이라 하였던가? 그 아인 잘 있고?”
“그…그걸 어떻게? 그 아이가 어미 뱃속에 있을 때 어르신께오서 한양을 떠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허허허, 다 아는 수가 있대두. 홍기 자넨 어찌 지내는가? 약국 제자들은 잘 키우는가?”
권기범이 유홍기의 안부를 물었다.
“부족할 따름입니다. 어르신의 가르침을 반인들 따르겠습니까. 헌데 어르신께선 저희가 당도할 줄 미리 아셨던 듯하옵니다.”
“글쎄, 오늘 이렇게 불현듯 방문하리란 생각까지는 못 하고 있었네. 평양에 며칠 더 머물 것으로 알았는데….”
“하오면 저희가 평양에 온 줄 알고 계셨단 말씀이오니까, 어르신?”
오경석이 놀라 물었다.
“알았다기보단 그저 한양에서 평양으로 떠났다기에 그런가보다 한 것이지. 자네들의 한양 생활은 종종 들어 알고 있네. 그간에 거래하던 이들이 있어 오갈 때마다 풍문으로 듣곤 하지. 자네가 득남했단 소식도, 홍기가 제자 기르기에 열심이더란 소식도 다 듣고는 있었네. 최근엔 평양에 다녀오겠다며 나섰다기에 혹여 내게도 들를까 고대하고 있던 터이긴 했네만, 이렇게 일찍 당도할 줄이야 미처 몰랐구먼.”
“예, 실은 관찰사 어른을 뵈옵고 한 며칠이라도 회포의 정을 나눌까도 싶었습니다마는 역매 이 사람이 워낙에 매인 몸이 되옵고 주상전하와 대원위 대감의 호의를 한 몸에 받는 처지인지라 곧 상경해야할 처지여서 급한 대로 어르신을 뵙고 올라가려 급하게 길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유홍기가 말했다.
“왠지 감시를 당한 느낌이 들어 석연치가 않습니다요, 어르신.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지요. 어르신께서 갑작스레 한양을 뜨신 이유나, 이런 터에 자리를 잡으신 이유나 의문투성이입니다.”
그래도 전․현직 역관끼리의 유대 때문인지 권병무와 이물 없는 오경석은 서운한 본심을 내비쳤다.
“하하, 노여워하지는 말게나. 감시라기 보단 관심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나니. 내가 가까운 자네들에게 조차 기별을 하지 않고 옮겨 까닭도 다 자네들을 위해서였네. 그래도 인재에 대한 미련은 남아서 계속 자네들과 연결할 준비를 해 온 것뿐이고. 절대 다른 의미의 감시는 아니었으니 서운함을 풀게.”
“어련히 뜻이 있어 행하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저희의 좁은 속으론 일의 대략만 짐작할 뿐 소상한 내력을 알지는 못 하겠으니 그것이 답답할 뿐입니다.”
유홍기가 말했다.
“대략은 짐작한다? 그 짐작이란 게 무엇인가?”
권병무가 기특하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어르신께서 광산에 관심을 가지셨다는 것만으로도 경신년 난리와 연관을 짓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어르신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을이 어때서?”
권병무가 더욱 흥미 있어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멀리서 본 이 마을은 정감록에 나오는 피난처로서의 지맥에 있었습니다. 수태극과 화태극이 만나는 천연의 산맥이 이루는 성벽 속에 담겨 있지요. 하온데 마을로 들어서며 보니 마을은 피난처가 아니라 하나의 병영이더군요. 마을의 중앙 뒤편으로 솟은 둔덕은 천혜의 토성이고요. 마을의 가옥들을 한데 모은 것도 통제와 집중의 이점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아마 호미봉 뒤편에 분산된 광산의 인원은 고스란히 어르신의 사병이 되겠지요?”
“오호라? 그래서?”
권병무의 낯은 그야말로 재미있게 되어간다는 듯한 웃음이 가득했다.
“해서, 어르신께서 다른 마음을 갖고 계신가 했습니다.”
“다른 마음이라?”
“어르신께서 경신년 난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일이라는 확신도요.”
유홍기가 단정을 지었다.
“자네의 말이 틀렸다고는 못 하겠네. 내가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은 사실이지. 지금 이 상태가 준비의 끝일 수도 있고 시작일 수도 있네.”
“하오면 지금 이 마을이 어르신께서 설파하시던 대동세상이란 말씀이옵니까?”
유홍기가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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