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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칫솔 함을 연다. 칫솔이 네 개 보인다. 두 개는 닦는 부위가 작다. 어린이 칫솔임을 어렵지 않게 안다. 문제는 어른 칫솔이다. 이때부터 나는 헛갈린다. 한 개는 손잡이가 연두색이다. 다른 한 개는 파란색이다. 어떤 게 아내 칫솔이고 어떤 게 내 칫솔일까. 얼른 판단이 서질 않는다. 한참을 생각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할 수 없다. 조금 창피하더라도 아내를 부를 수밖에 없다.
"여보, 어느 게 내 칫솔이오?"
"벌써 몇 번째예요. 파란색이 당신 칫솔이잖아요. 안되겠어요. 이제 이렇게 외우세요. 당신 이름의 마지막 자 '우'에다가 파란색의 '파', '우파', 어때요?"
나는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과연 탁견이다. 우파, 좋아. 앞으로는 절대 헛갈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를 닦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씁쓸하게 웃는다. 내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왜 이렇게 내가 깜빡깜빡하는 거지. 어제만 해도 그래. 얼마나 급했으면 내가 운전기사에게까지 물었을까.
나는 어제 문상을 다녀왔다. 친구부친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택시 안에서 내내 생각에 잠겼다. 고인에게 절을 몇 번 해야 하나. 두 번? 한 번? 헛갈린다. 이제 병원 영안실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이 자꾸만 급해진다. 그때 오토바이가 택시를 휙 가로질러간다. 두 명이 탔는데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다. 헬멧도 쓰지 않았다.
"요즘 젊은 놈들 다 저래요."
택시기사가 입맛을 쩍쩍 다셨다. 나는 "맞아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기사도 기분이 좀 풀리는 모양이다. 얼굴에 웃음까지 흘린다. 나는 이때다 싶었다. 사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택시는 이미 병원을 들어서고 있었다.
"기사님, 문상을 가는데 고인에게 절을 몇 번해야 하나요?"
나는 영안실로 들어섰다. 친구가 슬픈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나는 택시기사의 말대로 고인에게 절을 두 번 올렸다. 상주에게는 한 번 절했다. 나는 친구 손을 잡고 애도를 표했다. 친구가 가족들에게 나를 소개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누굴까? 누굴까? 아, 그래 맞아. 00이지. 이00. 너무 기쁜 나머지 나는 그만 친구 앞에서 웃고 말았다.
영안실 식당에서 나는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서로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희한하다. 그 친구 이름이 아주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안00. 물론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는 절친한 친구였다. 그렇다 치더라도 현재의 내 기억상태로 보아서는 분명 특이한 일이다.
"야, 00야, 우리가 몇 년 만이냐?"
"응, 그러니까…."
친구는 언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계산을 해보았다. 이거 어떡한다.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친구도 머리가 아프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너 휴대폰 있냐?"
"응"
"번호 불러봐라."
어, 그런데 또 헛갈린다. 010-0000-0047인가? 아니지. 010-0000-0048일 거야. 그게 아닌데. 에라, 모르겠다.
"010-0000-0047이다."
친구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보고 자기한테 전화를 걸어보라고 한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고 친구가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끊더니 친구가 피식 웃는다. 친구가 휴대폰 덮개를 열었다. 그러더니 쑥 내게 들이미는 것이었다. 나는 재빨리 휴대폰에 찍힌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010-0000-0046!"
아, 나는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내 휴대폰이 좀체 울리지 않은 이유를 나는 이제야 알겠다. 나는 지금까지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 전화번호를 잘못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화가 오지 않은 건 아닐까. 아, 이놈의 건망증. 나는 친구에게 거듭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양치질을 마친다. 칫솔 함을 열고 칫솔을 넣는다. 나는 반복해서 외운다. 행여 아내가 들을까봐 작은 소리로 말한다.
"우파, 희우 칫솔은 파란 칫솔, 그래서 우파다. 우파, 우파, 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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