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71회

등록 2005.04.28 08:10수정 2005.04.28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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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았고, 희생도 적지 않았다. 균달과 흑요를 잃은 것은 큰 손실이었다. 모든 것이 신검산장이란 곳을, 그리고 풍철영이란 인물의 신분내력을 모른 탓이었다. 본래 의도했던 목적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다. 다만 그래도 위안이 된 것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았을 뿐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큰 수확을 얻었다.

그것은 도박에서 모든 것을 누를 수 있는 천왕패(天王牌)와 같았다. 처음에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정말로 놀랐었다. 그 패 하나만으로 어떤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가 유리해질 수 있는 패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제 이곳을 조속히 빠져 나가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그 무한한 위력을 가진 패를 믿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패를 보이기도 전에 도박판을 엎는 자가 있다면 아무리 천왕패를 가지고 있다 해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최악의 상황도 고려해야 했다. 섭장천은 마주앉아 있는 지광계 부부를 바라보았다.

지광계는 풍철한의 일 때문에 후회하는 기색을 자주 보이고 있었다. 아직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는 그들에게 많은 정보를 줄 수 있는 자였다.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또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나 자신이 한 약속은 지켜야 했다.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니… 일단 자네가 먼저 알아 두는 것이 좋을 듯 하네. 단 이것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어야 하며 절대 외부로 누설하면 안 되네."

먼저 마음을 열어야 상대가 다가오는 법이다. 지광계에게 회의(懷疑)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이것을 역심단공(逆心丹功)이라 부르고 있네. 파괴된 단전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속여 허단전(虛丹田)을 만드는 것이지. 일단 이것을 받아두게."


섭장천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주머니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지광계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떠올랐다. 단전이 파괴된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저 속에 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은 그것을 받아야 하는지 망설였다.

"그 안에는 두개의 단약이 들어있고, 한 장의 도해가 그려져 있네. 노부가 해주고자 마음 먹고 있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만약을 위해 자네에게 주는 것이네."


"노야…."

"단약을 먹고 나면 누군가가 칠일 동안 매일 한번 그 도해에 따라 혈맥을 타통시키며 흩어진 진기를 도인해야 하네. 그러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기가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네. 그 순간에 지금부터 노부가 구술하는 심공에 따라 진기를 유도하게 되면 자네의 파괴된 단전 바로 위 배꼽 부근에 느낌이 올 것이네. 허단전이 생기는 것이지. 그렇게 삼개월 정도 진기를 운용하게 되면 잃어버린 자네의 공력을 되찾게 될 것이야."

확실히 섭장천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지광계는 잃어버린 공력을 되살릴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섭장천이 자신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고 있는 이유가 자신의 신변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고 보니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고 시일도 꽤 걸리는 일이었다.

"다만 일년에 한번 한달 정도 역혼기(逆魂期)라 부르는 지독한 고통의 시기가 오네. 그 고통은 정말 맨 정신으로는 참을 수 없는 것이지. 그래서 앵속이 섞인 단약을 먹고 한 달 동안 비몽사몽을 헤매며 지내게 되네. 괜찮겠나?"

이것은 그들만의 중요한 비밀이었다. 그것을 자신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은 모험과도 같은 일임을 지광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지광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절대 이 비밀이 누설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섭장천은 지광계가 마음속으로 아직 승복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약속은 지킬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전음을 사용해 역심단공의 구결을 일러주기 시작했다. 지광계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라 한번 만으로도 능히 기억할 수 있을 것이지만 섭장천은 개의치 않고, 연속하여 세 번을 구술해 주었다.

지광계는 섭장천에 대해서 이미 승복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속한 조직에 철저하다보니 자신과 갈 길이 다르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가 연속해서 세 번을 구술해 준 것은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지광계를 속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구결의 내용을 약간 바꾸었다면 연속해서 세 번이나 똑같이 구술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오랜 시일이 흘렀다 하더라도 제일(第一)이라는 수식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무공만 뛰어나다고 제일이란 수식이 붙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제일이란 수식이 붙었던 사람은 누구나 인정하게 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곳에 올라 본 자는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고, 그 제일이란 위명을 지켜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었다. 섭장천의 눈에 이채가 스치더니 밖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뉘신가? 왔으면 들어오던가 아니면 최소한 기척이라도 내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왔음을 알면서도 주인이 문도 안 열어 주는 것은 예의가 있는 사람이 할 짓인가?"

말과 함께 문이 열리며 마의노인과 담천의가 들어섰다. 들어 온 인물을 확인하는 순간 섭장천의 노안에 처음에는 의혹스런 표정이 떠오르더니 그것은 서서히 경악스런 표정으로 바뀌었다. 누군지 알아 본 모양이었다. 섭장천의 얼굴에 저러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인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갑자기 섭장천이 벌떡 일어섰다.

"일어날 것 없네. 자네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까. 삽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자네의 상대가 되지 못하네."

섭장천의 노안에 복잡한 기색이 뒤엉키고 있었다. 평상시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윽고 메마른 미소가 입가에 걸리면서 그는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앉게. 많이 늙었군."

"자네는 그렇지 않고?"

세월이 지나면 아마 들끓던 복수심이나 원한 같은 것도 누그러지는 모양이었다. 섭장천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자가 바로 저자를 포함한 그들이었다. 세 명이 합공을 했다하나 섭장천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 준 인물이었고,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낸 자들이기도 했다. 마의노인과 담천의는 섭장천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자네… 이곳에 있었나?"

"물론이네."

"그렇군. 풍철영이 어떤 인물인지 아는 순간에 자네들이 이곳에 있을 것이라 생각해야 했는데 자네 말대로 나도 늙었군."

"늙으면 기억력 뿐 아니라 판단력도 흐려지는 법이네."

"다른 친구들도 모두 이곳에 있는가?"

"몇 되지 않는다네.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 초야에 묻혀 사는 사람도 있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나누는 정담 같았다. 그렇다고 굳이 과거사를 꺼내 서로의 감정을 건들릴 일도 없었다. 칼을 맞대야할 일이 생기면 칼을 맞대면 그만일 터이지만 먼저 칼을 뽑아 들고 싸우자고 할 마음은 전혀 없는 것이다. 서로의 입장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나이를 먹다보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제는 쫒아 내려고 왔나?"

"틀린 말은 아니네. 하지만 먼저 이 아이에 대하여 말하는 게 좋겠군."

마의노인의 말에 섭장천은 힐끗 담천의를 바라보았다.

"왜? 저만하면 훌륭하게 컸지 않은가?"

"저 아이의 부친에 관한 얘기네."

또 한 번 섭장천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어렸다.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섭장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도대체 무얼 어떻게 말하라고 자신에게 데려왔단 말인가? 무얼 확인하기 위하여 자신의 입을 빌리려 한단 말인가?

"왜…."

섭장천이 눈을 떴다.

"잘난 자네들이 말해주지 않고 나에게 말하라는 겐가?"

"그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우리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네."

"나라고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은가?"

"자네는 아니 정확히 자네들은 부활했지 않은가? 그 일을 계기로…."

마의노인은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지. 그 일 이전에 이미 자네들은 힘을 모으고 있었지. 그 굴레를 벗어난 계기가 그 일 때문이었다고 해야지."

"자네들도 알고 있었나?"

"아니… 그 양반만이 알고 있었지. 그만둘 때야 비로소 말씀하시더군. 자네들은 왜 그 이전에 그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했나?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사정이 나아졌을 터인데…."

"그 양반 때문이었지. 최소한 짐승이 되기 싫어서였네."

잠시 말이 끊겼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이미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 사람을 뇌리에 떠올리고 있을지 몰랐다. 평생 그리고 죽을 때까지조차 잊혀지지 않을 사람. 나이는 그들보다 어렸지만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어야 했던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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