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이 신방을 차렸습니다

먹골은 온통 배꽃 천지입니다

등록 2005.04.28 13:22수정 2005.04.2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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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205년 4월 26일 먹골 배밭

2205년 4월 26일 먹골 배밭 ⓒ 이승열

a 이삭을 틔우기 시작한 밀밭의 일렁임이 배꽃이 더 환하게 합니다.

이삭을 틔우기 시작한 밀밭의 일렁임이 배꽃이 더 환하게 합니다. ⓒ 이승열


저는 열여섯 청춘처럼 정분이 나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할 나이도 아닌데 책상머리에 차분히 앉아 있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결사적으로 1시간을 버텼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으려니 창문 너머로 보이는 물오른 버드나무에 자꾸 눈길이 갑니다. 결국 저는 바깥 풍경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책장을 덮은 뒤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일제' 집을 나선 저는 배꽃을 보러 가자고 약속했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 봅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세상일을 다 짊어진 듯 바쁘거나 약속을 잊었다고 합니다. 그 중엔 아예 전화통화조차 못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배꽃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자던 약속은 내년으로 미뤄야 하나봅니다.

벌써 온 세상은 배꽃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a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배나무 화접을 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배나무 화접을 하고 있습니다. ⓒ 이승열

a 작은 깡통을 목에 걸고 긴 붓을 이용해 꽃가루를 발라주고 있습니다.

작은 깡통을 목에 걸고 긴 붓을 이용해 꽃가루를 발라주고 있습니다. ⓒ 이승열

사람들이 배 밭에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바로 '화접'이란 작업입니다. '화접'은 꽃가루를 붓 끝에 묻혀 배꽃에 발라주는 것입니다. 벌과 나비가 해야 할 일을 사람이 대신 하는 것이지요. 아마 험하고 심란한 세상이어서 벌과 나비가 오지 않나 봅니다.

예전엔 화접을 따로 하지 않아도 배가 잘 달렸다는데, 요즘엔 화접을 따로 하지 않으면 배가 잘 열리지 않아 먹고 살기 힘들답니다.


배 밭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은 조그만 깡통을 목에 걸고 수건으로 중무장을 했습니다. 그들은 서툴지만 진지한 손놀림으로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열심히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일을 한 대가로 배가 잘 익으면 배를 반값에 주겠다고 웃으며 말합니다.

배의 생산성과 품질은 얼마나 많은 잎수를 확보하느냐, 확보된 잎이 햇빛을 충분히 받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바람에 의한 낙과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지주시설을 설치했는데 요즘엔 과일의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기 위해 지주시설을 설치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배가 잘 자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을 '배나무유인'이라고 합니다.


a 하얀 배꽃은 신고, 붉은기가 감도는 것은 금촌입니다.

하얀 배꽃은 신고, 붉은기가 감도는 것은 금촌입니다. ⓒ 이승열

a 조팝나무도 배꽃처럼 온통 땅을 덮었습니다.

조팝나무도 배꽃처럼 온통 땅을 덮었습니다. ⓒ 이승열

멀리 황토로 만든 농막이 보입니다. 오늘 화접을 한 꽃들이 가을에 실팍한 열매를 맺고 그곳에 잠시 머무를 겁니다. 배나무유인을 위해 잘라 놓은 가지들을 붉은 벽에 기대어 세워놓았습니다. 튼실한 열매를 위한 희생물들입니다. 가지가 잘리는 희생 없이는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인간사나 배나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배 밭을 일구었을 농부들의 올망졸망한 무덤이 배 밭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먼 훗날, 오늘의 이야기를 배 밭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또는 바람에게 들려줄 겁니다.

a 가을이 되면 황토빛 농막에 배가 가득 차겠지요

가을이 되면 황토빛 농막에 배가 가득 차겠지요 ⓒ 이승열

a 배밭을 일궜을 사람들이 흙으로 돌아가 배밭을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배밭을 일궜을 사람들이 흙으로 돌아가 배밭을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 이승열

덧붙이는 글 | 화접, 배나무유인 같은 아름다운 말들을 내게 가르쳐준 배밭을 일구는 친구 영수기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덧붙이는 글 화접, 배나무유인 같은 아름다운 말들을 내게 가르쳐준 배밭을 일구는 친구 영수기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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