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도, 민심도, 하늘도 불탔다

[강원 양양 산불 현장] "우리집 불부터 꺼주세요" 곳곳에서 절규

등록 2005.04.29 10:09수정 2005.04.2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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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불부터 꺼주세요."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는 소방차 앞을 한 주민이 가로막으며 절규했다. 뒷산에서 불길이 자신의 집을 향해 몰려오자 다급한 마음에 소방차를 가로막은 것이다.

a LPG 통을 옮기는 경찰관들

LPG 통을 옮기는 경찰관들 ⓒ 최백순

클랙슨을 울리며 비키라고 손을 내젓는 소방관. 잠깐의 실랑이 끝에 소방차는 검은 연기가 솟구치는 마을 안 길로 달려가고 이 주민은 "119에 전화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왔다"며 달려온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또다시 절규했다.

28일 오후 4시. 양양지역에 산불이 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 7번 국도를 따라 차를 달렸다.

a 한 주민이 TV를 들고 연기 속에서 뛰쳐나오고 있다

한 주민이 TV를 들고 연기 속에서 뛰쳐나오고 있다 ⓒ 최백순

연곡쯤 도착했을 때 북쪽 하늘에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린 것이 보였다. 양양군 현남면 입암리 입구에는 경찰 차량과 소방차, 의용소방대, 인근지역의 공무뭔들이 몰고 온 차량이 뒤엉켰다.

그 사이 내륙에서 바닷가를 향해 휘몰아친 산불은 50여미터가 넘는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불기둥을 만들었다. 소나무 숲과 가까이 있던 집들에서 불길이 솟고 대나무 숲은 불길에 휩싸여 여기저기서 "펑" "펑"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대나무 마디가 불길에 터지는 소리다.

인근의 공장에서 일하던 아주머니들은 작업복을 입은 채로 자신들의 집을 향해 달려가고, 소방차를 기다리다 지친 농부들은 경운기를 몰고와 도랑가에 세웠다.


a 한 가족이 집주변의 불을 끄고 있다. 이 집은 주택만 남고 농기계와 가축 사료 비료 등이 모두 불에 탔다.

한 가족이 집주변의 불을 끄고 있다. 이 집은 주택만 남고 농기계와 가축 사료 비료 등이 모두 불에 탔다. ⓒ 최백순

농약 분무기를 이용해서라도 불길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급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불길이 거세지자 경찰관들이 LPG통을 둘러메고 진화를 포기한 채 물러났다. 카메라 초점을 맞출 수 없을 정도로 강풍에 몸이 흔들려 버티기 힘들었다.

순식간에 주변이 검은 연기에 뒤덮이고, 50여m 떨어진 주택의 집 뒤에서 불길이 일었다. 방송사 카메라 기자도 뛰어 가고 마을 주민들도 소방호스를 끌었다.


a 공장에서 일하다 달려나온 아주머니. 사람의 힘으로는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공장에서 일하다 달려나온 아주머니. 사람의 힘으로는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 최백순

한 아주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이불에 몇 가지 살림살이를 싸안고 집안에서 뛰쳐나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집 앞에 주저앉아 외마디 비명만 질러댔다. 집에 뛰어들어가 이 방 저 방 문을 열고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뒤 아주머니를 부축해 큰 길가로 옮겼다.

a 불타는 주택

불타는 주택 ⓒ 최백순

그리고 다시 달려가 사진을 찍는 기자의 뒤통수에 와서 꽂히는 말.

"이 새끼야, 호스 좀 당겨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기자들도 호스를 잡아 당겼다. 뒤이어 "야, 이 집에 LPG통 어디 있어. 그거 찾아야돼. 못 찾으면 폭발한단 말이야"라는 소리가 벼락처럼 들린다. 집 뒤 창고에 옮겨 붙은 불길을 보면서도 마을 주민들은 최선을 다 했다. 이 집은 다행히 불길을 모면했다.

a 자신이 평생 살던 주택이 불길에 휩싸이자 고개를 돌렸다(왼쪽 아래).

자신이 평생 살던 주택이 불길에 휩싸이자 고개를 돌렸다(왼쪽 아래). ⓒ 최백순

살림살이를 끄집어 내는 집을 지나자 한 주민이 TV를 끌어안고 연기 속에서 뛰쳐나왔다. 그 길 안쪽에는 거센 불길과 싸우는 가족이 있었다. 소 먹이를 위해 쌓아 둔 짚더미도, 농기계 보관 창고도 모두 타버린 불길 한가운데서 뜨거운 열기를 마시며 불길을 잡고 있었다. 놀란 아주머니는 넋이 나간 듯 플라스틱 양동이를 쥐고 주저 앉아 버렸다.

a 모든 것이 재로 변했다.

모든 것이 재로 변했다. ⓒ 최백순

검은 연기에 가려진 하늘에서 헬기 소리는 들려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연기와 그을음이 마을을 휘감아 돌고, 모두가 타버렸다. 푸르던 소나무도, 비닐 하우스 안에 자라던 고추 모종도, 평생을 살아온 집도 타고 있었다. 태양도 연기에 가려 빨갛게 탔다.

a 산을 타고 내려오는 불길

산을 타고 내려오는 불길 ⓒ 최백순

한 주민은 자신이 집이 불길에 휩싸인 걸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냥 이렇게 나왔어요."

이름을 물어도 대답 대신 두 손만 펴보였다. 이 골짜기에서만 4가구가 불탔다.

강 건너 임호정리 쪽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소방헬기들은 잔불 정리를 포기한 듯 강릉 쪽으로 향하는 불길을 잡는데 주력했다.

a 소 가족의 피난

소 가족의 피난 ⓒ 최백순

7번 국도변까지 경운기와 트랙터에 이불과 옷가지를 싣고 어미소와 송아지를 몰고 온 손명희(43)씨는 발을 동동 굴렀다. 소방헬기가 연신 물을 끼얹고 소방차들이 달려 갔지만 손씨와 이웃집이 불에 타고 말았다는 소식에 주저 앉고 말았다. 또 인근지역의 군부대도 병력과 장비를 호숫가에 옮기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날 불은 오후 3시 25분께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입암리 야산에서 발생, 주민 2천여명에 대한 긴급대피령이 내려지고 민가 13채가 불에 탔다.

양양군은 산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민가를 위협하자 이날 오후 4시 14분께 입암리와 임호정리, 포매리 등 12개 마을 842가구 1925명의 주민에 긴급 대피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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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양양 산불 긴박한 순간

덧붙이는 글 | 영동매거진에 실립니다

덧붙이는 글 영동매거진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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