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정든 양복아, 잘 가거라!

등록 2005.05.02 09:13수정 2005.05.0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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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아저씨가 그러는 거 있지요. 천이 닳아서 세탁을 할 수가 없대요. 이제 버려야겠어요.”


아내가 옷걸이에 걸려있는 양복을 보며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벌써 15년이야. 나는 양복을 본다. 군데군데 천이 흘러내리고 오그라들었다. 하긴 그럴 거야. 이제 그만 버릴 때도 되었어. 그런데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애잔한 걸까.

a 15년된 양복입니다

15년된 양복입니다 ⓒ 박희우

내가 그 양복을 산 건 15년 전이다. 1990년에 진주지원에 근무할 때였다. 내 기억으로 20만원 정도 준 것 같다. 당시에는 큰 돈이었다. 내 월급의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양복 속에는 내 젊음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17년의 공무원 생활이 켜켜이 묻어있었다.

1988년 4월이었다. 나는 그때 면접시험장에 있었다. 수험생들 모두가 말쑥하게 차려입었다. 깨끗한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 화사한 넥타이를 맸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저들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초라한가. 낡은 양복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때 점퍼를 입고 있었다. 수험생 중 점퍼를 입은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나는 초조했고 불안했다. 행여 옷차림 때문에 불이익은 당하지 않을 것인가. 아,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탁소에서 빌려서라도 입고 올 걸 그랬어. 온갖 생각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때였다. 면접관을 보조하는 듯한 사람이 내게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양복을 입고 오지 그랬어요?”
“그게… 실은 양복이 없습니다.”
“양복이 없어요?”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입맛을 쩍쩍 다시기까지 했다. 내 불안은 더해갔다. 여기에서 떨어지면 나는 더 이상 갈 곳도 없다. 서른 한 살 늦깎이를 받아주는 곳은 이곳 밖에 없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수험생들은 면접공부에 한창이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엉뚱한 문제로 고민이나 하고 있지 않은가.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내 신경은 온통 옷차림에 가 있었다. 면접관이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린다. 내게 몇 가지 질문을 하는데 짜증기가 섞여 있다. 나는 그럴수록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끝장이다.


나는 비교적 또렷하게 대답했다. 면접관의 표정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안경을 벗더니 엷게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희뿌옇게 변하더니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면접관의 마지막 말을 잊지 못한다.

“공부 많이 하셨습니다.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합격하면 열심히 하세요.”

그 후 2년이 지났다. 1990년이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양복 한 벌을 살 수 있었다. 제법 메이커 있는 양복이었다. 그 양복을 나는 지난주 토요일까지 입었다. 가을과 겨울에나 입을 수 있는 양복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애착이 가는 양복이었다.

a 사무실입니다

사무실입니다 ⓒ 박희우

이 양복과 함께 한 지 벌써 15년이 되었다. 그동안 월급도 많이 올랐다. 결혼도 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도 생겼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다. 지난해에는 아파트 분양도 받았다. 다른 직장에 있는 친구들은 정리해고다 뭐다 해서 무척 불안해하는 눈치다. 그러나 우리 직장은 아니다. 열심히만 하면 정년까지 보장된다.

나는 양복을 어루만진다. 오래된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 나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양복아, 잘 가거라. 내 목소리에는 울음이 배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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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수필을 즐겨 씁니다. 가끔씩은 소설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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