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원 관련 국가인권위 조사자료국가인권위원회
한국사회는 참 역동적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출발이 늦어도 빠르게 따라잡곤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빠르게 개선되고 있는 인권부문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인권의 증진이 모든 이들에게 고루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국가인권위가 주최한 ‘정신과시설에서의 인권 문제 개선 방안 모색을 위한 공청회’에서 발표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전히 많은 정신질환자들이 반인권적인 강제입원과 열악한 수용시설 속에서 격리와 강박 등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법정시설에 입소한 이들이 이러할 진데, 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비인가 불법시설 수용자들의 인권실태는 오죽할 것인가?
1983년 모 방송국에서 참혹한 정신질환자의 실태가 보도된 후, 정신보건법도 제정되고 정부 내 주무부처도 생겨났으며, 최근 지역사회정신보건관련 사업들이 증가하는 등 일부 긍정적인 노력들이 목격됨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자의 인권수준은 여전히 ‘원시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더욱이 최근에는 완고한 제도의 뒤편으로 밀려나는 듯한 인상이다.
세계 도처의 인권 운동가들이 모여 인류 모두가 예외 없이 마땅히 누려야할 인권의 가치에 대해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는 그 시간, 대도시를 벗어나 30분만 차로 달리면 되는 곳에서 아무런 인권보호조치도 없이 집단 감금되어, 전문가의 진단이나 치료도 받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침대에 묶여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는 2005년 ‘선진한국’ 인권의 이러한 ‘양극화’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권에는 경계가 없다. ‘부자의 인권’이 따로 있고 ‘가난한 이들의 인권’이 따로 있지 않다. 그러기에 오늘 한국사회가 보이고 있는 이 ‘인권의 양극화’는 그 자체가 ‘반인권적’이다. 그리고 그 반인권의 중심에 바로 정신질환자들의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
정신질환자의 인권을 이야기 할 때면 늘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일탈’과 ‘낙인’이다.
즉,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 일부가 때때로 보여 주는 기이한 행동과 어눌함은 무리한 단순화와 과장의 과정을 거쳐 다시 ‘불치병자’ ‘무능력자’ ‘사회에 유해한 자’ 등으로 간주된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이 일반인보다 낮음에도 그들을 ‘범죄자’ 또는 ‘범죄용의자’로 간주하는 게 바로 그러한 낙인의 예다. 그리고 이 ‘낙인’이 정신질환자에 대한 반인권의 중요한 근원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에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반인권’의 심각한 근원이 존재한다. 바로 ‘정신질환의 신화화(神話化)’다. 즉, 한 사회가 ‘나쁘고’, ‘열등하고’, 때로는 ‘설명 안 되는 것’을 ‘정신질환’이라 명명하고 그렇다고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 규율에 동의하지 않으면 ‘반사회적 성격장애자’로 간주하기 일쑤이고, ‘낮은 학습능력’이나 ‘세련되지 못한 정서조절 능력’ 역시 ‘정신병’으로 명명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그들의 항의와 호소는 빈번히 ‘증상’으로 간주되어 무시된다.
생활고에 시달려 어린 자식을 남겨놓고 목을 매야 했던 어머니의 눈물, 밤을 지새우던 한 여배우의 삶에 대한 번민은 그것이 ‘우울증’이라 명명되는 순간 하나의 ‘병적 증상’이 되고 만다. 그리고 나면 이제 아무도 그 참혹했던 빈곤의 아픔과 삶에 대한 번민의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화화는 거기에 ‘배제와 차별’이 배태되어 있으며 더욱이 이러한 신화 속에는 어떠한 ‘비상구’도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로 무서운 ‘반인권’의 공간이다.
그렇다면, 정신질환자의 인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우선 정신보건법을 인권에 근거한 법령으로 대폭 개정해야한다. 정신질환자와 이들에 대한 보건복지서비스의 제공실태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양질의 서비스에 대한 지속적인 기술적 지도 감독을 할 수 있는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 NIMH 와 같은 전문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전 수용시설을 개방하여야 한다. 그리고 극소수 환자에 대해 최소한의 시간동안만 정교한 인권 지침 하에서 폐쇄된 조건에서의 치료가 허용되어야 한다. 정신질환자의 가족협회를 시민사회단체들이 적극 참여하는 인권지지단체로 전환 확대해야 하고, 정신질환자의 법적 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건강한 ‘후견인’제도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 더 시급하고 근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우리 주위에 만연한 정신질환에 대한 그 잘못된 ‘신화’, 그것을 깨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는 조금 덜 아픈 이와 조금 더 아픈 이들이 있을 뿐이며, 이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눌 수 있는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알제리의 국민들이 프랑스 식민지하에서 고통 받고 있을 때, 정신과 의사이자 사회운동가였던 파농은 알제리 총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정신의학이란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의 환경으로부터 이질적이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의술이라 한다면, 저로서는 자신들의 고장으로부터 영원히 소외된 사람들이 절대적인 자아상실의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파농의 말대로라면 오늘도 실업의 공포, 일상적 차별, 경제적 빈곤, 폭압적 정치구조 속에서 마치 고향을 떠난 이방인처럼 자유롭고 행복한 일상으로부터 소외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도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질환자의 인권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 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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