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75회

등록 2005.05.04 07:33수정 2005.09.1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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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검산장의 갑작스런 변화에 육능풍은 직감적으로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심상치 않았다. 반당의 판단이 정확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었다.

"일이 터졌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추관의 보고에 육능풍은 어제 저녁 식사를 같이했던 풍철영과 담천의를 떠올렸다. 그들의 태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무슨 일인가 터졌다면 그리도 태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아침에 조국명이 움직이지 말라고 부탁했다지만 아예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인가?"

만향지 진독수가 얼굴의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추관이 어떤 인물인지 알기에 묻는 소리였다. 이곳에 들어와 있는 인물들이 사실 너무 대단한 바람에 졸지에 심부름이나 하는 존재로 전락하였다지만 철인당(鐵人堂)의 부당주(副堂主)로 철혈보의 서열 십구위가 바로 그였다. 헌데 그가 고개를 젓는 것이다.

"곳곳에 신검산장의 인물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인원은 얼마 되지 않지만 아주 정중하게 경고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드잡이라도 하겠다면 몰라도 그들의 이목을 피해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신검산장과 적대할 이유는 없다. 더구나 이미 정중하게 조국명이 움직이지 말 것을 요청해왔다. 주인의 정중한 부탁을 저버리는 것은 손님의 도리가 아니다.


"무슨 일인가 터졌어… 아주 심각한 일이… 그것도 우리와 저녁을 같이 한 이후에 말이지… 그게 뭘까?"

육능풍이 혼자 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연신 고개를 흔들거리며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어제 저녁 신검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리 저리 설치고 다니던 관외이흉이 피살되었습니다. 상대는 신검산장 내 인물로 보이는데 그 일과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대 일?"

육능풍이 묻자 추관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습니다. 안령도를 쓰는 자인데 무서울 정도로 빠른 쾌도(快刀)라고 보고 받았습니다."

"관외이흉은 몇 가지 병기를 사용했는가?"

"첫째는 두 가지, 둘째는 세 가지 모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추관의 대답에 육능풍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쾌도라 하기에 관외이흉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당한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가지고 있는 병기를 모두 사용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무기를 꺼내 들고, 더구나 두세 가지 모두를 사용했다면 관외이흉을 죽일 수 있는 인물은 무림에 그리 많지 않았다. 육능풍이 알고 있기로 그들의 연수합격은 손꼽는 고수라 하더라도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헌데 자신의 수하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의 이름도 없는 자에게 죽었다는 사실은 계속 육능풍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관계가 없을 거야. 표조귀살이란 놈 말에 의하면 아마 이번에 산서상인연합회 수장이 된 천병정(千兵鼎)의 나가 자식 놈이 개인적인 일로 이곳에 온 모양이야."

그들의 대화에 진독수가 끼어들었다.

"이곳에 담천의란 청년하고 동행해 들어 왔다던 두 놈이 있다고 했잖아. 그들 중 한명이 칠년 전 나가 자식 놈의 다리를 분지르고는 그 놈의 마누라를 들고튀었다 하더군."

추관은 어제밤 진독수가 한 놈을 붙잡고 세시진이나 등골을 뺀 일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 놈이 우광인가 하는 작자였던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추관은 자신이 넘겨짚고 있었던 생각을 접었다. 진독수 역시 상대를 어르고 뺨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우광이란 놈은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토해냈을 것이다. 그리고는 새벽에 나충일에게 돌아가 미친 듯 게거품을 물고 악을 쓰고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다지?

그 때였다. 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국명 총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시급한 일이라 하십니다."

"안으로 모시게."

추관은 말과 함께 어느새 문으로 다가가 열고 있었다. 조국명이 왔다면 그 심각한 일 때문에 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
"좋으이. 다 털어놓고 말하기로 하지."

섭장천의 말에 마노는 한 가닥 기대 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해지고 있었다. 언제나 뭔가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듯한 묵직함이 그들의 노안에서 웃음을 앗아가 버렸다. 이제 그 묵직함이 조금씩 녹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년 후에 그 사안에 대해 조사했던 아이가 있었네. 저 아이만큼이나 담명 장군과 가까운 사이였지."

"누군가? 그 아이가?"

"강명(姜明). 바로 강중 장군의 아들이네."

정신이 아득해왔다.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머리는 터질 듯 했다. 헌데 강명이라니… 동생 소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자신마저 잘 알고 있다고 느껴졌던 인물. 자신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오른팔을 떼어 주고 떠난 인물. 그가 자신의 부친과 함께 일했던 강중장군의 아들이었다니….

- 네 거처는 마련해 놓았다. 평생 네가 편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검을 접고 무림을 떠나다오.-

그가 했던 말이 그의 귀를 울리고 있었다. 그는 예상대로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 어차피 네 꿈을 펼치기 어려운 중원이다. 그들은 또 다시 너를 이용하고 버릴 것이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는 무엇을 얼마만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섭장천의 검을 배운 사내였다. 섭장천의 성하구구검을 익혔으니 섭장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터였다. 헌데 강중장군의 아들인 그가 어떤 연유로 섭장천의 검을 배운 것일까?

혼돈스러웠다. 악다문 그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아무 것도 물을 수 없었다. 그의 시야 역시 흐릿했다. 마주 앉아 있는 섭장천의 모습이 가물가물했다.

"어떻게 되었나?"

섭장천에게 묻는 마노의 목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들리는 환청 같았다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네."

실망스러웠다. 잔뜩 기대를 가지고 들은 대답이 고작 이것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저 이 정도를 말하려고 강중의 아들 강명의 말을 꺼낸 것은 아닐 것이다. 짜증 섞인 마노의 툴툴거림에 섭장천 역시 탄식을 뱉었다.

"하지만 아주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그 사안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적어도 세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니까."

"누군가?"

마노의 다그침에 섭장천은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고, 한 사람은 만날 수가 없었네. 그리고 또 한사람은 실종된 것인지 스스로 몸을 감춘 것인지 찾을 수 없었네."

"결국 한사람만 만나 보았다는 것이군. 그렇다면 왜 그 자의 목을 비틀더라도 알아내지 못했나?"

"그 아이의 부친이었기 때문이네. 강중장군이었지."

당연했을 것이다. 입을 다물고 있는 부친의 입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그 스스로 입을 열기 전까지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살아있나?"

"물론… 죽은 것과 다름없지만 말일쎄."

마노는 마른기침을 하듯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크큿… 반쪽짜리 균대위의 수장… 초혼령 조차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균대위의 수장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 역시 비운의 사내였다. 용맹한 무장이었지만 담명이란 인물로 인해 그 빛이 가렸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초혼령은 담명장군이 그만둔 후에도 강중장군에게 인계되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남옥의 옥을 처리하면서 초혼령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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