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76회

등록 2005.05.05 07:46수정 2005.05.0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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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는 중얼거림을 멈추고 다시 물었다.

“그럼 만날 수 없다는 또 한 사람은 누군가?”


“자네… 아니 이제는 풍철영이라 해야겠지. 풍철영이 몸담고 있는 비원이란 조직의 원주(院主)네. 자네도 알고 있나?"

“모르네. 말만 들었지 만나 본 적은 없네. 비원이란 조직은 균대위의 이면이라고 들었네. 아마 저 아이의 부친은 알고 있었겠지. 어쩌면 저 아이도 알고 있을지 모르고….”

그 순간 담천의의 뇌리에는 사부가 떠올랐다. 그다. 바로 그가 비원의 원주다. 만인을 굽어보는 풍모를 가지고 제왕의 기품을 가지고 있던 금포의 그 중년인. 자신을 키워주고 자신에게 무림인이라면 몽매에도 그릴 진산비학 세 가지를 가르쳐 주었던 그다.

이제야 담천의의 머리 속에서 흐릿하나마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는 알 수 없는 슬픔에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술이라도 깨물고 있지 않는다면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분노로 고함이라도 쳐야 할 것 같았다. 탁자 아래로 쥐어진 주먹이 본래의 색깔을 잃어 버린 지 오래인데도 그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중회에서 혈안이 되어 비원의 원주가 누군지 조사했던 모양이네. 하지만 주원장의 스물 여섯 명의 아들과 열 여섯 명의 딸 중 하나일 것이란 결론 외에는 결국 밝혀내지 못했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찾을 수 없었다는 자는 누구인가?”

“그 자는 자네도 익히 알고 있을게야. 담명 장군의 그림자라던 우교(偶矯)라고 불리운 자 말일쎄.”


우교(偶矯). 그랬다. 살아남았다면 그 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본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담명장군의 개인 호위이자 담명장군의 명령을 직접 전달해 준 자였다. 은밀하게 왔다가 담명장군의 명령서를 놓고는 온 적도 없는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곤 했던 자였다.

“그럼 그 친구는 그 사건이 벌어지던 날 그 자리에 없었단 말인가?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인가?”

담명장군이 균대위의 수장을 그만 두었어도 우교는 그를 따랐다. 언제나 그가 가는 곳에는 우교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있었다. 그런 그를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헌데 그런 그가 그 날 그 자리에 없었다니….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확실히 이해되지 않을 일이었다.

“모르지. 하지만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은 확인되었네. 하지만 그 자가 스스로 몸을 감추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도 찾아낼 수 없지.”

마노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 점에 있어서 우교라는 인물은 특이할 정도로 놀라웠다. 무표정하고 말이 없던 자였다. 내력도 알 수 없는 자였다.

“확실히 그랬겠군.”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끊겼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 와중에서 담천의는 하나하나 생각을 정리하고 의문을 되새기고 있었다.

누가 과연 자신의 부친을 죽인 것일까? 자신이 보았던 그 담가장의 혈사는 누가 벌인 짓일까? 지금까지 두 사람의 대화로 미루어보면 모두에게 혐의가 있었고, 살해 동기도 명백하게 모두 가지고 있었다.

첫째, 황제나 황실의 비밀기관이라는 비원이란 곳이다. 아마 사부가 원주일 것이고, 혈사가 있기 전 찾아온 그를 부친이 공손하게 대했던 것으로 보아 그는 태조의 황자(皇子)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균대위의 수장은 강중장군으로 바뀌었지만, 태조로서는 부친의 영향력을 절대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부친과 밀접한 남옥대장군을 숙청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수족처럼 움직이던 부친의 사직은 역모라 할 정도로 위협이 되었음에 틀림없었다. 아무리 훌륭하고 존경받는 수장이라 해도 모든 수하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 중 극히 일부라도 불만을 가진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황제는 반드시 그를 척결하도록 칙령을 내렸고, 그 불만을 가진 자들을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황제나 그 누군가가 직접 그만한 인물들을 모아 일을 도모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백련교도들이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부친은 제거해야 할 필연적인 대상이었다. 그들은 주원장에 대해 복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첫 번째 장벽이 부친이었고, 그들 중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누군가가 비밀스럽게 일을 도모했다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은 부친의 죽음으로 인하여 모든 면에서 자유로워졌고, 그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부활했다. 그들 전부는 아닐지 몰라도 일부는 분명 그런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섭장천은 부인하고 있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세 번째는 오중회였다. 오중회는 조직의 존폐위기까지 몰리는 상황이었다. 회주가 계속 죽어나가자 그들 조직 전체의 기반이 흔들린 것은 당연한 일. 회주를 세 명씩이나 두어야 했다면 그들이 얼마나 다급한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전면에 서 있었던 인물이 바로 부친이었다.

자리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그들의 복수심은 무마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낙향해 있어도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복수와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하나의 계기로 충분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조직은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도 있었을 터. 그러한 정보를 알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불안했을 것이다.

생각하지 못할 이유와 인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 군데가 가장 유력했다. 결과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부친이 죽게 되자 그들 세 곳은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고, 굳이 그 사안을 들쳐내서 조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조사하려는 자가 있다면 입막음을 해야 할 판이었다.

특히 그 사건을 일으킨 자들이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필사적으로 그 조사를 막았을 터였다. 진실이 밝혀지게 되면 손을 놓고 흩어진 균대위의 막강한 힘이 휩쓸어 버릴 터였다. 그 분노를 막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들의 힘이 막강했기도 했지만 그들 중 단 한 명이 남더라도 끝까지 복수하고자 들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의 부친을 죽인 흉수는 그 사안이 밝혀지기를 절대 원하지 않을 터였다. 아직까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면 분명 막으려 들 터였다.

“자네가 저 아이를 나에게 데려온 일이 저 아이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는가?”

한참만에 입을 연 섭장천의 말에 마노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모를리 없었다. 이 일이 알려지고 이 안에서 벌어진 말들이 새 나간다면 저 아이에게 위험이 닥칠 터였다. 어쩌면 자신들까지 위험에 빠질지 몰랐다. 그 순간이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마노의 손이 뒤집어졌다. 그러자 손바닥보다 작은 듯 보이는 원형의 물체가 그의 손을 떠나 빛살과 같이 금적수사 부부의 목줄기를 뚫고 마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너무나 급작스런 일이었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었다. 멀쩡하게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그들이 죽은 것이다. 섭장천과 담천의는 놀랐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지광계와 마봉옥의 목줄기에 아주 미세한 혈흔을 내고 마노의 손에 다시 돌아 온 것은 말발굽처럼 생긴 평범한 쇠붙이였다. 하지만 섭장천은 저 보잘 것 없는 말발굽처럼 생긴 쇠붙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섭장천은 속에서 올라오는 구토를 느꼈다. 메스꺼움을 동반한 이 구토증은 점차 그 주기가 매우 짧아지고 있었고, 그 정도도 참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아직 지독한 고통은 밀려오지 않았지만 곧 그러할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일년 중 한 번씩 찾아오는 역혼기가 임박해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참으며 탄식했다.

“자네의 그 잔혹하고 냉정한 성품은 그대로군.”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의 귀찮은 일을 내가 대신했다고 생각하게.”

살인멸구(殺人滅口)한 변명치고는 너무나 떳떳했다. 아주 당연하다는 태도였고, 상대를 위해 살인했다는 당당함이 있었다.

“자네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자네가 이들 부부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을 걸쎄. 풍철영과 이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 부부를 철혈보에 넘겨주려고 작정하고 있었네. 이들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철혈보로 끌려갔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렇게 고통없이 죽는 것이 나을 것이네.”

“궤변이로군. 나는 충분히 이들을 데리고 나갈 자신이 있었네.”

“나를 비난해도 좋네. 하지만 자네는 내가 손을 뒤집는 순간 무엇을 하는지 미리 알고 있었네. 헌데 왜 자네는 방관했는가?”

방관은 곧 살인멸구에 대한 비겁한 방조였다. 담천의는 몰라도 섭장천은 분명 마노의 움직임이 무언지 알고 있음에도 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말은 지금 여기서 거론되고 있는 말들이 밖으로 새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섭장천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마노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가 천왕패를 가졌음을 모르는 바 아니네. 그 아이는 분명 천왕패이지.”

또 한번 섭 장천은 놀랐다. 천왕패가 될 그 아이까지 자신들의 수중에 있고, 그 의도를 상대가 알고 있다면 이미 그것은 위력을 잃을지도 모르는 패였다.

“그 사실까지 알고 있었나?”

“아까도 말했듯이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그 순간에 포착되네.”

섭장천은 메마른 미소를 띠었다. 이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 완벽함은 아직 살아 있었고, 냉정하고 잔혹한 독아(毒牙)는 아직도 그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 그 독아에 물렸던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지독하고 공포스러운 것인지 뼈저리게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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