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막지 않았나?"
"어쩌면 우리가 바라고 있는 일일지 모르네. 어쩌면 자네가 그 아이를 데리고 이용하길 바랐던 것인지도 모르지."
"방관인가?"
"크큿… 그렇군. 또 방관이군."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텅 빈 공간을 헤집는 것 같았다. 탄식과도 같았다.
"그 천왕패를 보이기도 전에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네. 규칙을 깨는 것 말일세."
"그렇군. 저 아이가 판을 뒤집어 버릴 수 있는 존재라고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군."
"저 아이가 약속했던 일을 이행하기 위하여 풍철영에게 부탁을 한다면 그가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무 것도 모르는 저 아이가 저들을 철혈보로 넘겨주라고 부탁했다면 풍철영이 어쩔 수 없이 천왕패를 까뒤집으며 그래서 안 된다고 할까?"
마노의 지적은 정확했다. 천왕패는 유일하게 도박을 하는 상대인 풍철영에게만 절대적인 효력이 있는 패였다. 그리고 그 내용이 주위에 알려지면 안 되는 패였다. 어쩌면 도박의 모든 규칙을 깨버리고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짓을 할지도 몰랐다. 섭장천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자네가 데리고 온 그 놈은 어찌 할 텐가? 만약 지광계와 그 놈 중 선택하라면 자네는 누구를 선택하겠나?"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담천의는 품속에서 며칠전 새벽에 주웠던 은잠(銀簪) 하나를 꺼내 놓았다. 도인들이나 학관의 선생들이 관(冠)을 쓰기 전에 머리를 고정시키는 은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검산장에 들어올 때 송풍진인이 꽂고 있던 은잠이었다.
"자네까지 알고 있었군. 그렇다면 그 아이는 이미 풍철영의 수중에 있겠군. 노부가 실수를 했어."
섭장천은 신음과 같은 침음성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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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철영은 광지선사 일행이 왔음에도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만 했을 뿐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불안한 기색을 역력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언제나 말을 아끼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그에게 있어 저런 태도는 의외였다.
그는 손님을 불러 놓고 창가를 이리저리 걷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싶었지만 광지선사 일행은 묻지 않았다. 뭔가 일이 터졌다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청송자를 모시고 온 현수도장((玄壽道長)의 모습도 불안한 기색이어서 그들 일행을 더욱 의혹스럽게 했다.
뭔지 알지 못할 불안함이 흐르는 가운데에서도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탁자 위에 올려진 찻잔 위에서는 김만 모락모락 피어 올리고 있었다. 그 때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곧 바로 문이 열리며 조국명이 모습을 보였다.
"모시고 왔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으로 들어서는 인물들을 보며 광지선사 일행의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철혈보의 인물들이었다. 육능풍을 비롯 반당과 진독수가 먼저 모습을 보이고 그 뒤를 추관과 독고상천이 따라 들어왔다.
"일단 앉으시지요."
풍철영은 빈 자리를 가리키며 탁자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은 주인이 손님을 대하는 아주 자연스런 동작이었는데 돌발적인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손바닥을 내보이며 자리를 권하던 풍철영이 갑작스럽게 뒤집으면서 앉아있는 송풍진인의 견정혈을 찍어갔다. 너무나 의외의 일이었고, 미처 철혈보의 인물들이 자리에 앉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송풍진인의 반응은 빨랐다. 마치 풍철영이 공격해 올 줄 알았다는 듯 그는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누이며 그의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돌리며 신형을 빼내려했다.
"이미 짐작했군."
풍철영의 냉소가 터지며 그의 신형이 미끄러지며 그의 쌍수가 기묘한 각도로 꺾어져 송풍진인의 전신대혈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무당의 비기로 알려진 호조절호수(虎爪絶戶手)란 금나수법이었다. 호랑이가 먹이를 노릴 때의 움직임을 본 따 만들었다는 이 금나수법은 화려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음유한 기운과 함께 너무나도 부드럽고 쾌속하여 막기 힘들었다.
"이… 무슨 짓이오? 장주"
뒤늦게 파옥노군 규진이 영문을 몰라 나직이 호통을 쳤지만 이미 송풍진인은 아홉 군데의 대혈을 제압당한 상태였다. 더구나 풍철영의 손속은 단지 점혈을 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살기가 너무 짙게 뿜어지고 있었다. 분노가 섞여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풍철영의 공격은 너무나 급작스럽고 정확해서 불리한 위치에 앉아 있었던 송풍진인으로서는 피하기 어려웠다.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무슨 일인가? 풍장주. 이 일은 분명히 해명을 해주어야 하네."
홍칠공 노육 역시 노기어린 목소리로 풍철영을 꾸짖었다. 계속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니 철혈보 인물들이 들어오자 그들 일행 중 한명에게 손을 쓴 풍철영의 태도는 오해사기 십상이었다. 철혈보와 함께 자신들을 어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육능풍은 원월만도 좌승을 시켜 개방의 동추개 하강을 이미 반쯤 죽여 놓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풍철영은 잠시 숨을 돌리더니 침착하게 입을 떼었다. 그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으나 예의를 잃지 않았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오. 이 자는 송풍진인이 아니오."
그 말에 철혈보의 인물을 비롯하여 좌중은 모두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잠시 후면 모두 아시게 될 것이오. 본 장주가 이 늦은 시각에 결례를 무릅쓰고 여러분들을 오시게 한 이유는 더 이상 이들을 좌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소."
좌중은 풍철영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압된 송풍진인이 입을 다물고 있자 분명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입을 다물고 풍철영의 뒷말을 기다렸다.
"섭장천 일행이 이곳에 와 있음은 이미 모두 알고 계실 것이오. 또한 철혈보에서 빼낸 오룡번을 가진 금적수사 부부가 같이 와 있음도 아실 것이오."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서로 간의 영역을 지켜주기 위하여 속이고 속는 체 했을 뿐이었다. 육능풍의 입가에 느긋한 미소가 매달렸다.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후의 일은 자신들의 뜻대로 될 것이다.
"그들의 요청은 금적수사 부부를 구파일방에 맡겨 철혈보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면 노부가 뒤따라 다닐 때 왜 말을 하지 않았을까? 거 참 기이한 일이군."
홍칠공이 냉소를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의미였다.
"그렇소. 그들의 목적은 구파일방과 철혈보가 서로 싸우도록 만드는 이간책(離間策)이었소. 하지만 그것은 먹혀 들어가도 좋고, 아니더라도 좋은 핑계거리에 불과했소. 본래의 목적은 동생 철한이를 없애는 것이었소. 모든 흔적까지도 말이오."
심각한 일이란 것이 그것을 말함일 것이다. 풍철영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모든 것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 드리리다. 일단은 섭장천 일행이 이곳을 빠져 나가기 전에 잡아야 하오. 그들이 종남과 화산의 제자들을 죽였고…."
풍철영의 시선이 육능풍에게 가 멎었다.
"철혈보의 철개장(鐵鎧掌) 곡첩(曲捷)과 섬도(閃刀) 심홍엽(沈紅葉) 일행을 죽인 자들이니 말이오. 더구나 지광계 부부를 인계 받아야 할 것 아니오?"
도와달라는 말 대신에 그는 교묘하게 좌중을 동요시키고 있었다. 그것을 모를 능구렁이들이 아니었지만 굳이 탓할 생각은 없었다. 이곳은 신검산장이었고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이 안에서 손을 쓰게 해준다는 사실 하나로 그들은 만족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44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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