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과 청중, 불협화음의 이유는?

[取중眞담] EBS '청소년특강'의 반교육적 제작방식

등록 2005.05.04 23:44수정 2005.05.0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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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EBS가 교육주간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청소년을 위한 도올선생 특강' 상명고편 녹화가 있던 3일 오후 강의를 진행하던 도올선생이 제작진과 진행방식을 놓고 상의하는 동안 대강당 안은 내내 술렁였다.

EBS가 교육주간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청소년을 위한 도올선생 특강' 상명고편 녹화가 있던 3일 오후 강의를 진행하던 도올선생이 제작진과 진행방식을 놓고 상의하는 동안 대강당 안은 내내 술렁였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5일은 어린이 날이다. 9일부터 15일까지는 교육주간이다. '교육방송' EBS(사장 권영만)로서는 '제철'을 만난 셈이다. 이에 따라 EBS는 다양한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도올 김용옥 순천대 석좌교수의 '청소년 특강'도 그중 하나이다. EBS는 "미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한다"고 제작 취지를 밝혔다. 특히 다큐멘터리 <한국독립운동사> 연출을 맡은 도올이 제작과정에서 배우고 느낀 역사의식을 생생하게 전달할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3일 녹화현장은 이 같은 특강의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 상명고등학교 체육관에 기자들이 도착한 시간은 이날 오후 2시 20분경. 1300여명의 학생들이 체육관 1, 2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녹화 세트장 한 가운데 도올의 모습이 보였다. "역사란 무엇이냐, 인간이 땅 위에서 사는 걸 역사라고 한다. 우리 역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카랑카랑한 도올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진땀 흘리는 명강사... 졸고 있는 학생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곳곳에서 졸고, 잡담을 나누고 있는 학생들. 그동안 도올 강연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학생들 사이에 드문드문 섞여 있는 교사, 학부모 등 어른들도 매한가지. 방송조명의 뜨거운 불빛과 무더운 실내. 큰 창문은 빛을 차단하기 위해 둘러쳐진 대형 천막에 가려졌고 조그만 6∼7개의 창문조차 닫혀 있었다.

학생들은 연신 손부채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2층은 아예 더위를 식히려는 학생들의 손부채 물결로 시야가 어른거릴 정도였다. 진지하면서도 흥미로운 모습으로 강의에 빠져든 청중을 찾기 힘들었다. "이렇게 하면 강연이 안된다." 어린 청중을 앞에 놓고 진땀을 빼던 '명강사' 도올도 손을 들고 말았다. 강연은 행사시작 1시간 25분, 본 강의 25분만에 중단됐다.

a 찜통 같은 체육관에 연속 3시간 앉아 있었던 학생들이 지친 모습으로 강의를 듣고 있다.

찜통 같은 체육관에 연속 3시간 앉아 있었던 학생들이 지친 모습으로 강의를 듣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장내가 술렁였다. 더위가 심한 2층 학생들은 "더워요, 에어컨 틀어주세요" "화장실 가고 싶어요" 등을 외치며 하나둘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학부모 20∼30여명도 자리를 떴다.


아들이 상명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한 학부모는 "도올 강연이라서 일부러 왔다"면서 "여기 학생 대부분이 중학생"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중학생들이 고등학생용 강의를 이해하겠느냐, 더운 날 많은 학생을 꽉 막힌 체육관에 넣어놨으니..."라고 걱정하다가 자리를 떴다.

이날 1300여명의 학생 중 고등학생은 200명도 안됐다. 상명고등학교 시험일이기 때문. EBS에 따르면 학교를 바꾸는 안도 검토했으나 상명고등학교측이 워낙 적극적이어서 인근 중학교 3학년을 참여시키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결국 청중은 불암중, 보람중, 상명여중 학생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교사들도 하나둘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불암중학교 소속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한 교사는 "며칠 전 학교로 협조 공문이 왔다"면서 "좋은 강연이라서 왔는데 아이들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2층 학생들은 빼도 되지 않겠느냐"고 제작진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작진 "부채질 좀 그만 해라, 화장실도 가지 말라"

그 사이 일부 학생들은 체육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은 오후 1시부터 앉아 있었다고 했다. 2층에 있던 한 여중생은 "조명으로 사람 죽일 일이 있느냐"고 항변했다.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 앞으로 달려가 "강의를 듣지 않으면 안 되느냐"고 호소했다. 교사들은 "조금만 참자"고 만류했다. 한쪽에서는 "가고 싶다"는 학생들과 말리는 교사 사이에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제작진은 설교 반, 부탁 반 학생들을 달랬다. 프로그램 제작을 맡은 외주사 대표가 무대에 섰다. 그는 "화장실 가고 싶다, 바람을 쐬고 싶다'는 학생들 요청에 "이러면 안된다, 조용히 해달라, 나가면 안된다, 화장실도 가지 말라, 부채질 좀 그만 해라, 옆 친구와 떠들지 말라, 선생님이 어지러워 강의 집중이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혼란은 30여분간 계속 됐고 도올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강의가 여러분에게 어려운 듯하다, 15분으로 압축해서 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자유롭게 질문하고 내가 답하는 형식으로 바꾸겠다." 촬영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다. 학생들의 환호와 박수로 첫 장면을 재연출했다.

다행히 장내 분위기도 안정을 되찾았다. 도올 역시 중학생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강의형식을 바꿨다. 조선왕조와 일제 침탈, 동학운동과 3.1운동, 유관순·안중근·김구·여운형 등 독립투사들의 항일운동, 남북분단과 이념투쟁, 박정희 전 대통령과 10.26사태 등 일화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50분이 지나갔다.

오후 4시. 첫 강의가 끝났다. 학생들은 일제히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학원시간 때문에 가야 한다"며 교사들에게 상의하는 일부 학생들 모습도 눈에 띄었다. 20여분의 휴식시간. 도올은 쉬지도 못한 채 취재기자들을 상대로 이날 특강 및 다큐멘터리 <한국독립운동사>에 대해 약식 간담회를 가졌다.

누가 교육의 주인인가

EBS가 교육주간을 맞이해 특별기획으로 마련했다는 청소년 특강 현장, 그것도 일선학교 한 가운데서 벌어진 광경이다. 1시간 30분 넘게 그 자리에 있던 기자의 마음은 참담했다. 도올의 '명강의'도, 영화배우 설경구를 주인공으로 상업영화에 도전하고 싶다는 도올의 포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른들 편의에 밀려 찜통 같은 체육관에 3시간씩 앉아 있어야 하는 어린 학생들의 생기 잃은 얼굴, 인간의 기본욕구인 생리현상 해결마저 묵살 당하는 현실. 우리 교육과 방송의 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못하는가. 과연 누구를 위한 교육이고, 누구를 위한 특강인가. 아무리 훌륭한 강사, 훌륭한 강의내용을 준비했다고 할지라도 학생 눈높이에 맞추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욱이 이날 마지막 강의 주제는 '도올과 청소년의 대화'였다.

도올도 적잖이 애먹은 기색이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애초 예정됐던 상명고 학생들이 오늘 시험이 있다고 해서 강의날짜를 연기하려고 했는데 중계차 문제로 되지 못했다"며 "(강의초반 학생들과) 소통문제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진지한 얘기로 젊은이들에게 접근하는 게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면서 "그래도 오늘 수업에 임한 학생들 자세는 매우 훌륭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제작을 맡은 외주사와 EBS, 현장특강을 요청한 학교측 자세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제작환경에 대한 사전점검 없이 고등학생용 특강에 중학생을 참여시킨 제작사, 유명강사의 방송 프로그램이라면 유치해놓고 보자는 학교, 비교육적 제작방식에 둔감한 EBS. 이들에게 교육의 가장 중요한 주체인 '학생'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들에게는 학교홍보와 일정에 쫓기는 프로그램 제작이 당장 시급했다. 학생들의 '아우성'은 '편한 생활방식에 익숙해 참을성이 무뎌진 아이들의 조급함'으로 인식됐다. 또 제작현장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돌발상황이거나 '해프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날 녹화현장에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없었다. 방송 프로그램을 위한 '청중'이 있을 뿐.

EBS와 제작사측은 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강연 초반에 학생들과 강사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 되지 않은 점은 있으나 후반에는 매끄럽게 잘 마무리됐다"고 밝혔다. 또 "의도하지 않았지만 돌발상황으로 제작과정에 시행착오가 있던 점은 개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게 되길 바란다. 공영방송 EBS, 교육방송 EBS는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날 현장녹화는 애초 예정시간인 오후3시 30분을 넘기고 오후 5시 10분께 끝났다.

a EBS 제작진이 학생들에게 "아무리 덥더라도 강의 도중 부채질은 삼가할 것"을 주문하자 사방에서 "더워죽겠는데 그럼 어떡하냐"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EBS 제작진이 학생들에게 "아무리 덥더라도 강의 도중 부채질은 삼가할 것"을 주문하자 사방에서 "더워죽겠는데 그럼 어떡하냐"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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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언련) 사무차장, 미디어오늘 차장, 오마이뉴스 사회부장 역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현재 노무현재단 홍보출판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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