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해도(海島)
1
더운 바람이 찐득찐득 몸을 휘감았다. 그믐밤의 칠흙 같은 어둠도 사위를 삼킨 채 말이 없었다.
'끼익, 끼익'
일었다 사그라드는 파도 틈으로 노젓는 소리만 간간이 새어 나올 뿐 죽음 같은 적막만 가득했다.
"선장, 이곳이 맞는가?"
"틀림 없습니다. 해주 수멍 바위라 하면 이곳 하나뿐입니다요."
"그래도… 왠지 어둠이. 너무…."
선장의 말에도 사내는 왠지 미덥지 못한 마음이 드는 듯 했다.
"이럴수록 고마운 일입지요. 그저 파도 소리와 별빛 하나면 족합니다."
선장은 여전히 자신이 있는 표정이었다.
전체 길이 60척이 넘을 듯한 거대한 그림자가 어둠 속을 엉금엉금 기듯 해안 쪽으로 근접해 갔다. 전체 길이가 그렇다면 꼬리 부분을 뺀 배의 본판(저판: 배 아래쪽의 평평한 나무판)만도 족히 40척은 될 터였다.
항해용 돛은 내린 상태로 좌우 각 5개씩의 노만 느릿느릿 움직이는 배는 판옥선보다는 훨씬 작고 병선보다는 큰, 흡사 방선(防船)과도 같은 형태였다. 바로 전선과 조운선의 기능을 겸하도록 제조된 병조선이었다.
"그냥 포구나 조선소 쪽으로 접안할 것을 그랬어."
짙은 어둠 속에서 접안하는 것이 못내 불안한지 사내가 말을 내뱉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안광과 훤칠한 자태가 예사롭지 않은 사내였다.
"염려 놓으십시오. 이쪽도 파선을 할 만치 험한 곳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누굽니까? 어렸을 땐 고기잡이배로 10년, 젊어서는 수군으로 10년, 늙어서는 조운선으로 10년을 지낸 사람입니다. 황해와 경기 연안 물길은 눈감고도 압니다요. 안심하십시오."
"그래, 말이라도 그리 해주니 적이 안심이 되네."
"그리고 포구 쪽 별장이 뒷배를 봐 준다고는 하지만 너무 빈번히 써 먹는 것도 좋지 않고, 조선소 쪽은 그러잖아도 애써 숨겨야 할 곳인데 자꾸 눈길이 가게 해서도 안 되는 일입지요. 여기가 은밀히 싣고 내리기에 적합한 곳입니다요."
"딴은 그래…."
사내는 선장의 말 때문인지 더 이상 군말을 달지 않았다. 이들에겐 그믐을 이용한 거래가 처음이 아닐 터인데 괜한 걱정이다 싶었다.
횃불 하나 밝히지 않은 배가 용케도 왼편 바위 무더기 산을 피해 해안에 다가 섰다. 닻을 내리기 전 선장이 초롱에 불을 붙여 좌우로 흔들었다.
해안 저편의 솔밭에서 반짝 빛이 흔들렸다. 사내와 사내 뒤의 장정들 몇이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사내 옆의 두 장정은 품 속에서 오혈포를 꺼내 들었다.
해안의 솔밭에선 여전히 불빛 몇 점이 더 일었을 뿐 더 이상의 일은 없었다. 누군가 부싯깃이라도 치는 모양이었다. 이어 해안 솔밭에서도 초롱불이 좌우로 흔들렸다.
"개성 상단이 도착해 있는 모양입니다."
선장이 사내에게 보고했다.
배 상판의 난간 위로 몸을 드러낸 사내가 피식 웃었다. 개눈에 똥만 보인다더니 어둠 속의 불빛을 화승에 불댕기는 모습으로 오인한 자신이 웃겼다.
"선적하지."
사내가 나직이 명을 내렸다.
"예, 선적하랍신다. 닻을 내리고 문을 열어라."
선장이 이어 복명하며 외쳤다.
해안선 거의 끝자락까지 진입한 병조선에서 닻이 내려졌다. 서해안의 얕은 수심을 고려해 배의 밑판을 평평하게 만드는 조선의 독특한 조선술 때문에 이 큰 배가 직접 해안 가까이 진입하는 게 가능했다. 이 정도 배면 흘수(吃水)가 두 자를 크게 넘지 않을 터였다.
곧이어 선수(船首)의 노판(배의 앞부분)이 열렸다. 다른 배에는 없는 독특한 하선 방식이었다.
문이 열리자 검은 옷을 입을 사내들 예닐곱이 우르르 뛰어 내렸다. 허리 위로 차오르는 바닷물을 헤치며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총을 머리 위로 올리고 허리의 딴띠와 발화통을 벗어 치켜 올린 모습이 대략의 깊이까지 예측한 매우 익숙한 동작이었다.
순식간에 모래사장에 오른 검은 옷의 사내들이 좌우로 갈리어 뛰기 시작했다. 곧이어 좌우의 바위 능선으로 넓게 산개를 마친 이들로부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좌선 이상무!"
"우선 이상무!"
검은 옷인데다가 거리도 있어서 형체는 보이지 않았으나 낮고 짧은 목소리가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하선!"
선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입을 벌린 배의 앞전에선 자그마한 사후선(伺候船) 하나가 내려졌다. 엄밀히는 배와 배 사이 포구와 포구를 연결하는 사후선보다는 훨씬 작은, 마치 긴 상자만큼이나 작은 쪽배였다. 정식 사후선은 배의 고물 위에 매달려 있었다.
쪽배엔 세 명이 탑승한 후 노를 저었다. 물고기 비늘처럼 간혹 번쩍거리는 잔잔한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갔다. 꽁무니에 줄을 늘어뜨린 채 미끄러진 쪽배가 금세 모래사장에 닿았다. 모선으로부터 불과 40보도 안 되는 거리였다.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선장이 뱃전에서 쪽배가 닿은 해안 쪽을 보며 사내에게 물었다.
"그것이 예의겠지? 이 배의 무장이 소포(小砲) 두 문이라 하였던가?"
"예, 그것 뿐입죠."
"거적을 걷고 솔밭 쪽으로 돌려 두게. 그리고 초관은 남아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예."
코 등에 큰 점이 있는 초관의 짧은 대답을 뒤로 하고 사내는 호위 둘과 상갑판을 내려섰다.
앞뒤에 줄을 매어 당겨 배와 해안 사이를 왕래하는 그 쪽배에 사내가 몸을 싣는 것을 확인하자 선장이 점 있는 초관을 향해 물었다.
"저 양반 원래 저래 깐깐하쇼? 도대체가 얼마나 오래 살려고 저리 조심스럽노?"
"투덜거리지 마쇼. 그 덕분에 선장님도 오래 사실테니까."
점 있는 초관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에잉 이거 원. 나이도 새파랗게 젊은 게 직급이 얼마나 높길래 이리 건건이 반말인고?"
쪽배에 탄 그 사내의 간섭하는 태도가 마땅찮은지 선장이 투덜거렸다.
"알면 놀래실 겝니다. 기회 있을 때 잘 모십시오."
점 있는 초관이 말하며 또 빙그레 웃었다.
"하긴, 자네 같은 초관이 설설 기는 것을 보면 보통 직급은 아닌 듯도 하고…."
선장이 소포의 폐쇄기를 열고 그 안에 장전된 포탄을 확인하며 지나가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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