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천둥번개 친다는데 그래도 산에 가요?”

'제자들 함께 산에 가기’ 두 번째 이야기

등록 2005.05.08 10:37수정 2005.05.0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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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욕실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데 휴대폰 신호음이 울렸습니다. 손에 묻은 비누 거품을 얼른 물로 씻어내고 아내가 건네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생님, 저 명희인데요, 오늘 어떡해요?”
“응, 명희구나. 일단 죽도봉으로 나와.”
“비가 올 것 같은데요?”
“비가 조금 와도 괜찮을 거야. 비를 피할 데도 있고. 비가 많이 오면 바로 내려와서 중앙시장 먹자골목에 갈 거니까 우산 꼭 챙겨서 나오고. 알았지?”
“예, 알았어요. 그럼 이따 봬요.”

전화를 끊고 다시 머리에 비누를 묻혔습니다. 그 사이 또 전화가 오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도 머리를 다 감고 나자 나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저 나린데요. 오늘 천둥번개 친다는데 그래도 산에 가요?”
“그래? 그래도 아직은 비가 안 오니까 우산 준비해서 나와. 요즘 너희들하고 산에 갈 생각만 하고 살았는데 너무 서운하잖아?”
“알았어요.”

a 가늘게 내리는 봄비에 오히려 더 푸르른 우산 속 아이들

가늘게 내리는 봄비에 오히려 더 푸르른 우산 속 아이들 ⓒ 안준철

지난 식목일에 반 아이들과 산을 다녀온 뒤 딱 한 달이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6모둠의 아이들과 산행을 하기로 했는데 하필이면 산에 가기로 한 날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퍽이나 실망을 했습니다. 그래도 산행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난 4월 8일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생일을 챙겨주다 보니 아이들도 제가 해준 것처럼 이런 저런 축하의 글을 한 장의 종이에 깨알 같이 적어 저에게 전해주었는데 그 중 이런 글귀가 눈에 띠었습니다.

‘선생님! 한 달이 다 돼가지만 아직 선생님이랑 친하지도 않네요.’


이름만큼이나 진실하고 참해 보이는 아이. 그런 진실이가 저랑 친하지 못했던 이유는 어쩌면 바로 그 조용하고 얌전한 성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학기 초에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아이들을 먼저 다독이고 관심을 주고 하다보면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자신의 일에 충실한 아이들을 본의 아니게 소외시키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수업시간마다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눈을 맞추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해마다 에너지가 넘치거나 교사의 특별한 관심과 지도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어서 그들에게 진액을 다 쏟다보면 정작 잘하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지 못하는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날 저녁 저는 진실이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다음 산행을 꼭 같이 하기로 약속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날 이후 출석을 부를 때마다 대답하는 목소리나 눈빛이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그 눈빛을 보면서 저는 함께 산에 갈 일만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함께 산행을 하기로 한 일곱 명의 아이들 모두 좀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잠을 설치고 말았습니다. 마치 소풍날을 받아 놓은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아침 9시가 되자, 우산과 사진기를 챙겨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택시를 타면 불과 5분 거리지만 맑은 동천을 따라 걸어서 갔습니다. 도중에 부담임 선생님을 만나 함께 약속장소인 죽도봉에 도착해보니 좀 이른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아직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저는 잠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저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산행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이 트기 전이라 어둠이 남아 있는 아침 산에는 저 말고도 제 또래의 아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매일같이 산을 오르기는 마찬가지였지요. 비가 오는 날도 하루 공치기가 싫어서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받쳐 들고 산에 올라간 날도 많았습니다.

요즘은 산에서 청소년들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토요일 오후나 휴일, 심지어는 방학에도 산을 찾는 청소년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고등학생이 된다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루 15시간 이상을 학교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감금되어 있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방학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불과 일주일, 혹은 열흘 남짓한 방학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시간조차도 공부와 상관없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모 일간지에서 한국 여자 골프의 간판스타인 박세리 선수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최근 자신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부진을 거듭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박세리 선수는 대회 개막 전날 있었던 공식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토로합니다.

“온통 골프뿐인 생활에 지쳤어요.”

또한, 그녀는 스웨덴 골프선수인 안니카 소렌스탐이 ‘훈련도 열심이지만 쉴 때는 골프 생각은 제쳐두고 확실하게 쉬는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훈련과 휴식이 균형을 이룰 때 지속적으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이치를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지요. 아니, 그보다는 이미 체질화된 자신을 어찌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진단이겠지요.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입시를 준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가 한 권의 책을 읽고 감성적인 글귀 한 줄에 매달리는 것조차 대학입시와 연관을 시키지 않으면 뭔가 헛일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학부모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왜곡된 교육열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미래를 암담하게 하고 아이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해치는 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가진 400여명의 청소년들을 포함한 한국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온통 공부뿐인 생활에 지쳤어요.”

a 제비꽃 반지를 달아주시는 고현정 부담임 선생님

제비꽃 반지를 달아주시는 고현정 부담임 선생님 ⓒ 안준철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서 산을 타기 시작한 우리 일행이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11시 13분이었습니다. 다행이 비가 많이 뿌리지는 않았고 오히려 해가 쨍쨍할 때보다 선선하고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어휴 힘들어.” “너무 멀어요.” “땀이 나 죽겠어요.” 이 세 마디만 반복하며 힘들게 산을 오른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엔가 딱 한번 산을 오르고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정상에 오르자 기분이 좋은지 표정이 환해졌습니다. 아마도 다음 산행은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땐 다른 아이들처럼 여유 있게 산을 즐길 수도 있겠지요.

산을 다녀온 다음날 저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의 주인공인 나리와 저는 산을 오르면서 시와 문학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나리가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집에 써놓은 습작시도 있다기에 언제 보여 달라고 했더니 고개들 끄덕이며 그러마고 했습니다. 함께 산을 오르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뻔한 일이었습니다.

교무실에서 나리가 쓴 편지를 읽다가 저는 한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산에 다녀온 소감문을 곁들여 담임에 대한 따뜻한 위로의 마음이 담긴 편지였기 때문입니다. 언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을 만큼 너무도 곱고 섬세한 심성이 엿보이는 글이었지요. 제 이름이 들어간 쑥스러운 대목을 빼고 산행 소감문만 소개할까 하다가 제자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의 허락을 받고 전문을 소개합니다.

아름다운 시인, 안준철 선생님께

항상 웃음을 띠며 우리를 반겨주시는 안준철 선생님이라 더더욱 행복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된지 2년째. 방황도 많이 되고 힘든 시기입니다. 안준철 선생님 덕분에 저는 이렇게 반듯이 학교생활 잘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희망, 용기, 행복, 사랑을 주는 그런 매력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학교를 재밌게, 행복하게 다닐 수 있는 이유 아닐까 싶어요.

항상 힘드신 거 알아요. 근데, 왜, 그 아픈 마음, 답답한 마음, 숨기고, 혼자 아파하세요? 선생님, 얼굴에, 고민이 있다고, 다 써 있어요. 솔직히 우리 반 아이들 천방지축이잖아요. 한 아이 잡아주면 한 아이가 말썽 피우고, 그 애를 또 잡아주면 또 다른 쪽에서 가지가지 새로운 사고를 치고 오고. 그때마다 얼마나 속상하고 힘드신 거 알아요.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하시려고, 속으로 얼마나 아파하고 힘들어하실까, 걱정도 됩니다.

a 봉화산 정상 근처에 핀 눈부신 철쭉을 뒤로 하며 하산하는 길

봉화산 정상 근처에 핀 눈부신 철쭉을 뒤로 하며 하산하는 길 ⓒ 안준철

아! 오늘 산에 다녀온 거, 정말 추억이 되고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선생님이 주최하신 거라서, 오려던 비도, 좀 늦춰졌나 봐요. 날씨도 그리 덥지 않고 선선해서 등산하기 좋았어요. 올라가면서 눈도 즐겁다고, 눈웃음이 절로 나는 것 같았어요. 아주 이쁘고 보기 좋은 철쭉, 진달래꽃들. 아주 멋진 관경이었어요. (…)

선생님과 함께 한 점심! 아주 특별했죠. 닭을 위해서 아주 필사적으로 달려갔더니, 정상까지 가자는 말에 힘이 쭉 빠지더라고요. 그래도 정상에 올라가니까 아주 기분이 좋았어요. 순천이 제 눈 안에 다 보이는데, 너무 시원한 거 있죠? 순천이 다 보이듯, 사람도 알면 알수록 마음이 보일까요? 그럼 사람과 사람 인연 맺기가 쉬울 텐데 말이에요.

정상까지 올라간 뒤엔 점심 먹으러 갔었죠. 정말 맛있던데요? 다음에 한 번 더 맛보기 위해서라도 한 번 더, 산에 올라가야겠어요.

선생님, 보기보다, 나이가 좀 많으시지만, 마음만은 저희같이 어리신 것 같은 안준철 선생님! 정말 존경합니다. 항상, 밝은 모습 잊지 않는다는 거, 정말 존경해요. 선생님의 마음이 항상 변치 않길 빌며, 전 이말 쓸게요.

From 선생님의 든든한 제자 나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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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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