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차관보정욱식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대결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6자회담의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미국은 북한에 대해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북한이 핵문제 해법 원칙으로 제안해온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부시 행정부의 고위 관리가 북한에 대해 '좋은 의도'(good intention)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6자회담 재개를 위해서는 조건과 명분이 필요하다고 요구해온 북한의 반응이 주목되는 대목이다.
미국 시간으로 5월 6일 오후 국무부 차관보 집무실에서 약 40분 동안 이뤄진 단독 인터뷰에서, 힐 차관보는 시종일관 협상에 대한 자신감과 필요성을 역설했다. 아울러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강한 유감을 표했다. 북한이 과연 핵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인터뷰 내용 영어 전문은 평화네트워크 홈페이지 www.peacekorea.org 참조.)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힐 차관보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북한을 '주권국가'라고 칭한 것은 미국이 북한과 평화적으로 공존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북한이 주권국가라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지 않다"며,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
"그 말은 북한과의 평화공존 의사를 갖고 있다는 뜻이냐"는 거듭된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의지를 밝혔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고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북한의 회담 복귀를 거듭 촉구했다.
특히 힐 차관보는 북한이 라이스 장관의 발언 가운데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 of tyranny)라는 세 단어에 집착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라이스 장관이 분명히 한 것은 (북한에 대한) 좋은 의도(good intention)"라고 말했다.
다만 미국이 북한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없다"(no hostile intent)라고 표현하는 것은 북한이 원하는 것으로써, 미국은 자신이 판단에 따라 적당한 표현을 사용한다며, "좋은 의도"를 거듭 강조했다.
'평화협정' 체결 논의도 가능
힐 차관보는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으로 체결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6자회담의 맥락에서 다자간 합의(multilateral agreement)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것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이냐"는 거듭된 질문에 대해, "상원의 인준은 매우 길고도 복잡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중요한 것은 부시 행정부의 의지가 아니겠느냐"는 필자의 지적에 대해, "우리는 모든 종류의 안전보장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그것은 다자간 안전보장의 맥락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의사라고 밝혔다.
아울러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논의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한 지난 3차 회담에서 미국이 제안한 안전보장 방안에 대해 북한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6자회담에서 북한이 원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6자회담이 재개되면 대북한 안전보장 방안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전까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핵 폐기 준비에 돌입하면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다자간 안전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기존 제안도 수정 가능"
더욱 주목할 점은 힐 차관보가 기존 제안을 수정할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는 점이다. 그는 회담이 열리면 "미국은 3차 회담에서 내놓은 제안 내용을 수정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물론이다"고 답했다.
힐 차관보가 이러한 의사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4월 6일 서울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평화네트워크 초청 토론회에서도 이러한 의사를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당시 토론 내용 전문은 홈페이지 www.peacekorea.org 'Top issue' 참조.)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를 비롯해 고위 관리들이 기존 제안을 수정할 의사가 밝힌 것은 이례적인 일로써 분명 주목할 가치가 있다. 작년 6월 3차 6자회담 이후 콜린 파월과 콘돌리자 라이스 등 고위 관리들은 "우리는 지난 6자회담에서 매우 좋은 제안을 (북한에) 했다"며, "미국은 그 제안을 고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힐 차관보는 잇따라서 기존 제안을 수정할 수 있다(make some revision)고 밝혔다. 미국의 정책을 '불변'으로 여기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음미해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북한은 미국이 3차 회담에서 내놓은 제안은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일방적 주장이라고 반발하면서, 작년 7월 24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제안"이라고 일축한 바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북한은 핵문제의 해법으로 동시 이행에 기초한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을 요구해왔다. 북한의 핵 포기와 안보적·경제적 우려가 단계적이고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은 사실상 '선(先) 핵포기'를 담고 있는 미국의 기존 제안이 바뀌지 않는 한 6자회담에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