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를 다 심고 풀을 베어 덮기 시작했다.전희식
고추 심는 날. 이날은 아침부터 온 동네가 북적거렸다.
새벽 일찍 한씨 할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고추모종을 트럭으로 좀 실어다 달라는 전화였다. 일흔 여덟인 한씨 할아버지는 지금도 키가 육척이 넘고 기운이 장사인데 젊었을 때 한량으로 고을을 휩쓸던 분이다.
마수마을 정씨가 매년 모종을 키워 우리 동네까지 실어다 주었는데 오늘은 너무 바빠서 직접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마른 날만 계속되다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자 우리 동네뿐 아니라 면내 모든 사람들이 고추를 심게 되었고 정씨는 고추모종을 배달해 줄 겨를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기예보를 듣고 고추 심을 준비를 해 뒀던 나는 한씨 할아버지를 태우고 정씨네 하우스로 갔다. 한씨 할아버지는 600주, 나는 500주를 가져왔다.
올해는 '환상적'으로 고추를 심었다. 몇 포기 안 되는 고추를 심으면서 굳이 내가 환상적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들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작년에는 모종은 자라서 곁가지가 나오려고 하는데 비는 안 오고 땅에서는 먼지만 풀풀 나는지라 물통을 리어카에 싣고 포기포기 물을 주면서 혼자서 심어야 했다. 심을 때만 고생한 것이 아니다. 심어 놓고 두 번 더 물을 주어야했다.
올해는 비가 이틀간 때맞춰 내려주었고 외지에 공부하러 가 있는 두 아이가 때마침 귀가한 때여서 온 식구가 한 순간에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일을 수월하게 했다고 해서 환상적이라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