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NHK뉴스 안봐도 되는 거야?"

[해외리포트] 호주에 한국어뉴스 방송되던 날

등록 2005.05.15 01:18수정 2005.05.17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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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YTN뉴스를 시청하는 한인동포 가정

YTN뉴스를 시청하는 한인동포 가정 ⓒ 윤여문

"이 노인네의 일요일 아침을 즐겁게 만들어준 YTN에 절하고 싶다."

시드니 서북부에 위치한 한인타운 노스 에핑에 혼자 거주하는 방모(72)씨는 지난 5월 8일 오전 8시, 호주 공영방송인 SBS TV <월드워치(World Watch)> 프로그램을 통해 첫 방영된 YTN 뉴스를 시청하고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통하는 외국어라고는 서툰 일본어가 고작인 방 노인은 호주 시드니의 안방에서, 그것도 비디오가 아닌 공중파TV로 한국어뉴스를 시청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한국 뉴스는 매주 일요일 아침 30분씩 방송된다.

방노인을 더욱 신나게 만든 것은 매일 아침 방영되는 일본 NHK 뉴스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하루 종일 호주TV 방송사들의 영어뉴스가 방영되지만 그냥 그림만 보는 처지였기에 그나마 NHK뉴스를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던 터였다.

방 노인이 지금 혼자 사는 이유도 사실은 영어뉴스 때문이다. 아내와 사별한 후에 장남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영어뉴스를 설명해달라는 할아버지의 부탁을 무시하는 손자를 꾸중하다가 며느리와 사이가 나빠진 것.

그는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어 뉴스를 시청하면서 그동안의 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면서 "이게 아니었다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면서 살았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호주 한인교포들의 오랜 숙원, 한국어뉴스

a 호주공영 SBS방송 로고가 설치된 방송국 입구

호주공영 SBS방송 로고가 설치된 방송국 입구 ⓒ 윤여문

하나의 섬이면서 대륙이기도 해 고프 휘틀럼 전 총리가 '섬대륙(The Island Continent)'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호주대륙은 한반도 크기의 약 35배나 된다. 그 넓은 땅에 사는 한국인 숫자는 유학생과 주재상사원을 포함해서 6만 명 남짓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공중파 TV를 통해서 한국뉴스를 시청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오랫동안 숙원사항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커뮤니티의 규모가 작더라도 출신국의 국력이라도 강하면 일본처럼 NHK뉴스를 방영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동안 한국의 국력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호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숫자는 수만 명의 주재상사원들을 빼면 1000명 남짓밖에 안된다.

한국뉴스가 방송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3년 공산베트남 뉴스가 호주에서 공중파를 타고 방영되자 베트남 커뮤니티(호주거주 베트남인들)에서 연일 SBS 방송사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베트남커뮤니티의 시위로 공산베트남뉴스는 중단됐지만, 이 때 곤욕을 치른 방송사는 같은 시기에 신청됐던 한국뉴스 방송요청도 거절했다.


더 나아가 SBS TV는 소수민족그룹 뉴스를 방영하는 프로그램인 월드위치에 새로운 국가를 추가할 때는 '해당 커뮤니티의 공청회 개최'를 의무화 하는 등 규정을 한층 더 강화했다.

다시 한국뉴스 방송이 가능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길남 시드니 총영사관 공보영사가 부임하면서부터다. 또 한인사회 실정을 잘 파악하고 있던 올리야 부야르가 SBS TV지역사회 협력국장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호주 SBS "'용광로 시스템'아닌 '샐러드 접시'가 되자"

a 호주SBS의 한인직원들

호주SBS의 한인직원들 ⓒ 윤여문

SBS(Special Broadcasting Services)는 지난 75년 호주에 살고 있는 200여 소수민족을 위해 설립된 공영방송이다. 이는 72년 고프 휘틀람 노동당 정부의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 철폐'가 가져온 결과였다.

국제사회에서 악명을 떨치던 백호주의가 철폐되면서 호주는 빠르게 다민족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새로 유입된 이민자들은 영국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호주 백인문화를 익히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호주 당국이 기대했던 '호주사회로의 동화(assimilation)'도 몇 세대가 지난 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호주 당국은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문화사회정책(multiculturalism)'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백호주의 철폐 8년만의 일이다.

SBS 방송은 이때부터 소수민족 프로그램을 통해 이민자들이 가져오는 고유의 문화적 습관이나 인종적 특성이 호주사회와 갈등을 불러오지 않는다면 호주문화를 더욱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증명했다.

이민 전문가들은 미국과 호주의 이민문화정책을 다음과 같이 나눈다. 미국의 이민문화정책이 미국화를 전제로 하는 '용광로(melting pot) 시스템'이라면 호주의 이민문화정책은 그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샐러드 접시(salad bowl) 시스템'이라고 분석한다.

'샐러드 접시 이민문화정책'이라는 용어의 구체적인 예가 바로 호주SBS 방송이다. 출신국의 언어로 출신국의 뉴스와 문화를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방송하면서, 다른 소수민족 문화를 수용하는 방식의 다민족다문화주의를 실현해 보이고 있다.

68개국 언어로 방송되는 공영방송, UN의 축소판

a 호주 원주민과의 화해를 상징하는 SBS직원들의 손바닥 마크

호주 원주민과의 화해를 상징하는 SBS직원들의 손바닥 마크 ⓒ 윤여문

호주 SBS의 이같은 다민족언어 뉴스서비스는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 등 다민족국가에서 리서치하러 온다는 것.

호주 SBS 라디오(www.sbs.com.au/radio)의 경우 68개 언어로, TV의 경우 18개 언어로 방송된다. 스페인어 아랍어 등은 10여개 국가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100여 개 소수민족을 커버하는 셈이 된다.

주양중 한국어 프로그램 책임PD는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 나라에서 제작한 그 나라의 시각으로 전달하다 보니 소수민족 뉴스를 있는 그대로 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프로그램간 시각차로 항의전화도 잦다고 말한다.

"사실 호주 SBS는 UN의 축소판 같다. 협상을 통해서 갈등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세르비아와 크로에티아가 전쟁을 할 당시 자국에 불리한 방송만 나가면 전화가 불통되는 것은 물론이고 방송국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곤 했다. 지금은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이 자주 부딪치는 편이다."

5월 8일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어뉴스 방송은 호주 SBS에서 방송하는 18개 국가의 뉴스중 하나를 차지한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김창수 시드니 총영사는 "SBS TV를 통해 한국뉴스를 시청하는 것은 모든 한인들의 큰 바람이었다"면서 "한국어뉴스 방영은 급속한 성장세를 보이는 호주 한인사회의 위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주 PD는 "이번 협상과정에서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이민자들은 출신국 국력에 따라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연방정치인 배출 등 호주 주류사회에 나가 한인커뮤니티를 위해서 일할 인재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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