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전통의상을 입고 삼바를 추다

[해외리포트] 독일 이방인들의 카니발, '문화 축제'

등록 2005.05.20 17:19수정 2005.05.2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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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행사장의 한 무대에서 아프리카 북을 가르치고 있는 흑인 아저씨와 아이들

행사장의 한 무대에서 아프리카 북을 가르치고 있는 흑인 아저씨와 아이들 ⓒ 강구섭

비 내린 오후를 뜨겁게 달군 브라질 삼바의 여인.
중국에서 날라온 붉은 용.
대굴 대굴 굴러가는 드럼통 북장단에 맞춰 열광적으로 춤을 추는 젊은 남녀.


베를린이 붐비기 시작했다. 45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평상복이 아닌 '특별한 복장'을 걸치고 거리를 메웠다. 크로이츠베르크의 한 공원에는 350여개의 부스가 설치됐다.

전체 인구 340만명 가운데 10분의 1 이상인 45만명이 외국계 거주자인 독일 베를린에서는 매년 특별한 '의식'이 열린다. 5월 중순에 열리는 '문화축제(Karneval der Kulturen)'가 그것으로 이 행사에는 연인원 1백만여명 이상이 참가한다. 베를린 거주 인구의 3분의 1이 행사장을 찾는 것이다.

지난 14일, 유학생인 나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그 행사를 쫓아가봤다.

a 이게 뭐지? 아프리카 토속 악기를 만지며 신기해 하는 아이

이게 뭐지? 아프리카 토속 악기를 만지며 신기해 하는 아이 ⓒ 강구섭

아프리카 전통 의상을 입고 큰 가죽북을 목에 둘러 맨 흑인 아저씨. 행사의 주요 장소인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의 한 공원의 작은 무대에서 꼬마들에게 북을 가르치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댄스 가수용 마이크를 머리에 쓴 흑인 아저씨는 모국어 억양이 섞인 독일어로 연신 아이들을 격려했다. 북을 끼고 앉은 아이들은 그의 추임새에 맞춰 신나게 북을 두들겨 댔다.

a 삼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방문객들

삼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방문객들 ⓒ 강구섭

a 스페인 여인의 매혹적인 플라멩코

스페인 여인의 매혹적인 플라멩코 ⓒ 강구섭

"다 같이 춤을 추자."

노래를 부르던 가수의 외침에 무대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무대 앞에서 흘러나오는 라틴의 삼바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독일 베를린 한복판에서 머나먼 땅 라틴의 열기에 빠져 들었다.


다른 무대는 스페인의 붉은 열정으로 가득했다. 붉은 원피스를 입은 스페인 여인이 기타 반주에 맞춰 매혹적인 플라멩코를 선보였다. 풍선을 든 아이와 아빠의 목마를 탄 아이들도 한동안 무대 앞을 떠나지 못했다.

엇! 문화축제에 웬 정치적 색채가?


a 평상시 먹던 음식들도 축제 현장에서는 각국 대표 음식이 된다. 둥근 불판 위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독일 소시지.

평상시 먹던 음식들도 축제 현장에서는 각국 대표 음식이 된다. 둥근 불판 위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독일 소시지. ⓒ 강구섭

a 축제 속의 작은 축제. 브라질 음료를 팔던 부스에서 음료를 팔던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축제 속의 작은 축제. 브라질 음료를 팔던 부스에서 음료를 팔던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 강구섭

즐거운 볼거리가 있는 곳에 맛난 먹거리가 빠질 수야. 신나게 몸을 흔들던 사람들은 잠시 공연이 끝난 사이, 이곳저곳에 설치된 음식 부스를 돌며 세계의 맛을 경험했다. 맥주의 나라 독일답게 나이 지긋한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고 있다.

모국의 국기를 걸어 놓은 각국의 음식 부스들은 자기만의 멋과 맛을 담은 음료를 직접 만들어 팔았다. 브라질 국기가 걸린 부스 앞에서는 알코올 음료를 팔던 사람이 자기가 만든 음료에 취한 듯 탬버린을 흔들며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독일의 웬만한 축제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이 축제는 어른들에게도 인기 만점. 14일 열린 어린이축제 퍼레이드에는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동물, 요정, 탐험가, 인디언 등 귀엽고 익살스런 복장을 하고 행진을 벌였다.

a 사라져 가는 세계의 토속원주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활동을 펼치는 국제 단체 서바이벌 부스

사라져 가는 세계의 토속원주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활동을 펼치는 국제 단체 서바이벌 부스 ⓒ 강구섭

문화라고 해서 뭐 거창한 게 있을까.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문화다. 이번 문화 축제에서는 문화가 사람들의 삶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모습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서바이벌'. 서바이벌은 브라질 아마존 인디언 대량 학살 사건이 1969년 세상에 알려진 것을 계기로 만들어져 현재 세계 82개국에 지부를 두고 있는 국제단체다. 토속 원주민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 서바이벌의 할 일. 서바이벌은 토속 원주민들이 세상과 단절된 원시적인 삶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서바이벌도 문화 축제장 한편에 부스를 꾸몄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문화 축제에 왜 이런 단체가 참가했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사라져 가는 진짜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a 행사장에서 만난 티베트 부스. 이해와 관용을 지향하는 행사의 정신에 잘 어울린다.

행사장에서 만난 티베트 부스. 이해와 관용을 지향하는 행사의 정신에 잘 어울린다. ⓒ 강구섭

티베트 국기를 걸어 놓은 작은 부스도 눈에 띈다. 문화 축제가 지향하는 다양성과 관용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 부스는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티베트의 자주권을 알리기 위해 설치됐다.

이 부스에서는 10년 전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중국 정부에 의해 납치되어 생사조차 불투명한 '니마'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니마는 티베트에서 종교적으로 중요하게 추앙되고 있는 인물. 부스를 차린 독일인은 중국 정부에 니마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서명을 받고 있었다.

기자는 이곳에서 티베트 국기를 처음 보았다. 한참 국기를 쳐다보던 기자에게 부스의 독일인은 티베트 국기가 그려진 스티커를 건넸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지구상 최고의 고원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국가 티베트를 위해 부스를 설치한 독일인의 모습에서 문화 축제의 진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태양을 가슴에 품다' 세계 문화 대행진

a 문화 축제의 진수인 거리행진의 포문을 연 다국적 그룹 아폭세 로니. 거리를 정화하고 행진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길 기원하는 브라질 전통의식을 펼치고 있다

문화 축제의 진수인 거리행진의 포문을 연 다국적 그룹 아폭세 로니. 거리를 정화하고 행진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길 기원하는 브라질 전통의식을 펼치고 있다 ⓒ 강구섭

4일간 진행되는 문화 축제의 진수는 바로 거리 퍼레이드. 총 100여 개 그룹 4500명이 참여한 퍼레이드에서는 세계 각국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퍼레이드는 전통 복장을 한 각국의 사람들이 모국의 춤과 음악, 전통놀이를 보여주며 장장 4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마치 지구촌 이곳저곳의 볼거리를 보여 주는 방송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축제의 현장을 한데 옮겨 놓은 듯했다.

각국의 전통적 색채와 문양 등으로 한껏 멋을 부린 90여 대의 차량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선사했다. 세계의 저명한 문화인사로 구성된 퍼레이드의 심사위원회는 그 나라의 멋을 잘 나타낸 차량을 골라 시상하기도 한다.

퍼레이드는 '아폭세 로니'라는 다양한 국적의 멤버로 구성된 그룹의 행렬로 막이 올랐다. '아폭세 로니'는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거리를 '정화'하는 동시에 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브라질의 전통 의식과 춤을 선보였다.

a 중국에서 날라온 빨간 용. 용보다도 용을 들고 떼지어 뛰어다니는 중국인들의 표정이 더 볼 만했다.

중국에서 날라온 빨간 용. 용보다도 용을 들고 떼지어 뛰어다니는 중국인들의 표정이 더 볼 만했다. ⓒ 강구섭

a 거리행진에 참여한 한국 풍물팀, 신명나는 풍물놀이로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

거리행진에 참여한 한국 풍물팀, 신명나는 풍물놀이로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 ⓒ 강구섭

이어서 세계 각국의 퍼레이드 행렬이 이어졌다. 명절 때면 특집 방송으로 방영되던 서커스에 항상 등장했던 외발자전거, 회색 도시 베를린을 붉게 물든인 삼바의 여인, 날렵하고 힘찬 기운을 자랑하는 중국의 용 등 각국의 삶과 문화를 보여주는 행렬이 계속 이어졌다.

세 번째로 등장한 한국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교민, 이민 2세들로 구성된 대규모 풍물놀이를 선보였다. 풍물놀이패는 신명나는 한국의 가락을 선보여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고 사람들은 장단에 맞춰 연신 몸을 흔들며 즐거워했다.

독일 특유의 서늘하고 흐린 날씨는 참가자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가장 고역을 치른 사람들은 더운 열대 지방에서 온 사람들. 사모아에서 온 20여 명의 무용단은 15도의 '추운' 날씨에도 꽃무늬 치마에 맨발 차림으로 아름다운 춤을 선보여 구경꾼들의 환호를 받았다.

삼바의 나라 브라질에서 온 삼바춤 그룹의 여자 댄서 베아트리스 톤조어에게 추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톤조어는 "나는 가슴에 태양을 안고 있다"라며 남미의 정열을 한껏 뿜어냈다.

a 나도 악기다! 행사 진행 차량 위에서 드럼통을 신나게 두드리고 있는 남녀 청년들

나도 악기다! 행사 진행 차량 위에서 드럼통을 신나게 두드리고 있는 남녀 청년들 ⓒ 강구섭

a 문화 축제의 하이라이트 거리행진에서 축제 복장을 갖춘 브라질인

문화 축제의 하이라이트 거리행진에서 축제 복장을 갖춘 브라질인 ⓒ 강구섭

행진 끝에는 지극히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테크노 춤꾼들의 무대가 선보였다. 그 가운데는 드럼통을 악기로 개조해 신나는 타악 한판을 선보이는 젊은 그룹도 있었다. 그들은 돈이 없어도 재미나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퍼레이드는 낮 12시 30분경에 시작해 저녁 9시경 막을 내렸다. 올해퍼레이드에는 70여만 명의 구경꾼이 참여해 명실상부한 베를린 최대의 문화 행사임을 실감케 했다.

퍼레이드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서 만난 독일인 라우(46)씨는 "다문화가 존재하는 베를린이라고 하지만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다른 나라의 전통문화, 춤이 아주 재미있고 흥미롭다"라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다수의 외국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베를린이 다문화 사회가 되는 데 크게 기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로 왔다는 마이어(30)씨는 "언론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정치적인 사안을 넘어서 각 나라의 문화와 음악을 직접 접하고 즐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평가했다.

우리는 다르다, 그러나 축제는 하나다
'문화 축제'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1996년에 시작돼 올해로 10회를 맞이하는 베를린 문화 축제가 다른 문화행사와 가장 구별되는 점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직접 보여주며 독일인, 다른 외국인과의 문화적·정서적 벽을 허문다는 것이다.

축제를 위해 세계 각국에서 오는 각종 단체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베를린 문화 축제의 일등공신은 뭐니뭐니 해도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 그들은 장농에 잘 보관해 뒀던 민속의상을 꺼내 입고 나와 자신이 자라면서 배우고 즐겼던 전통 축제를 선보인다.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외국인들이 행사의 주인공이면서 가장 큰 몫을 담당하는 것이다.

문화 축제(Karneval der Kulturen)는 베를린에서도 가장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는 베를린 노이쾰른에 자리잡고 있는 문화단체의 주도로 1996년 시작됐다. 다양한 민족, 종교,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거주자가 늘어나면서 그만큼 갈등이 발생할 위험성도 커졌는데 각국 사람들 간의 만남 및 대화의 장을 만드는 역할을 하고자 했던 이 단체는 문화라는 매체를 통해 다문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일조하기 위해 축제를 기획했다.

다양한 외국계 거주자의 문화적 역량을 이용한 살아 숨쉬는 문화행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베를린 문화 축제는 행사에 참여하는 민족, 인종의 다양성과 풍부한 문화적 스펙트럼으로 런던의 노팅힐 카니발, 네덜란드 로테르담 카니발과 함께 유럽 최대의 문화 축제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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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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