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결혼기념일 선물은 기저귀?

아이들과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아내의 모습

등록 2005.05.19 22:52수정 2005.05.2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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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월이면 아내는 은근히 나를 조릅니다. 결혼할 당시 빈약한 예물에 대한 보상으로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근사한 선물을 선사하겠다는 결혼 전의 내 약속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근사한 선물이 무엇이냐고 내가 되물으면 아내는 거침없이 '돈'이라고 말합니다. 살림하느라고 옷 하나 변변하게 못 사 입는 자신을 위해 일년에 한 번쯤은 옷이라도 사 입게 돈을 선물하라는 겁니다.

물론 아내의 이런 바람은 결혼하고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매년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그저 만원 안팎 하는 경양식 집에 가서 저녁 식사 한 끼 하는 걸로 끝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봤자 아이들을 위해 케이크를 사들고 집으로 와서 잘라 먹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아내를 위해 준비한 두툼한 돈봉투

그런데 어제는 조금은 다른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난 큰맘을 먹고 아내를 위해 돈봉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퇴근하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이게 뭐예요?"
"아빠가 엄마한테 주는 선물이래요."


뒷좌석에 있던 큰 녀석이 내 대신 얼른 대답합니다. 봉투를 열어본 아내는 깜짝 놀랍니다. 파란 종이 뭉치가 생각보다 조금 많았던가 봅니다.

"이렇게 많이 어디서 마련했어요?"
"아빠가 은행에 있는 큰 기계에서 뽑아 왔어요. 아빠가 편지도 썼어요."


그제야 아내는 봉투 안에 들어 있던 메모지를 찾아서 읽습니다. 편지래야 별 내용이 있겠는지요. 그저 고생한다, 사랑한다, 계속 고생해라, 뭐 이 정도 내용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감격한 모양입니다. 물론 그게 돈 때문인지 편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침까지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양 시치미 뚝 떼고 있었던 내 모습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사실 아침까지만 해도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아내는 많이 실망한 눈치였습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내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아내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며칠 전부터 아내는 나에게 우리의 결혼기념일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충분한 언질을 주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내 시큰둥하게 반응을 했을 뿐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긴 했지만 혹 아내가 정말로 삐쳐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조마조마하게 보내온 지난 며칠 동안의 시간이 드디어 이 순간에 충분한 보상을 받는 듯 했습니다.

"여보, 내가 꽃도 준비했어."
"무슨 꽃요? 꽃은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차 안을 두리번거리는 아내를 태우고 우리의 텃밭이 있는 쪽으로 신나게 달렸습니다. 텃밭 주위에는 5월의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거 다 당신 가져. 꽃도 갖고 향기도 갖고. 오늘 다 못 가져 갈 것 같으면 두고두고 와서 가져가고 말이야."

아내는 차에서 내려 크게 한번 숨을 들이켜 보더니 활짝 웃었습니다. 그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최근 들어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큰아들, 다음 코스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식당으로 가야 해요. 그리고 식당에서는 조용히 해야 됩니다. 떠들어서도 안 되고 돌아다녀서도 안 돼요."

어린이 집에서 제 엄마가 근무하는 곳까지 오면서 충분히 교육을 받았던 터라 큰 놈은 잊어버리지 않고 술술 말합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막내 놈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슨 의미인지 모를 박수를 '딱딱' 칩니다. 아마 자기도 오늘만큼은 잘 할 수 있다는 뜻인가 봅니다.

사실 작년에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우리 집 두 악당 녀석들이었습니다. 식당에 가서 떠들고 장난치고 돌아다니고 울고불고 하는 녀석들을 돌보느라 제 엄마는 밥은커녕 물도 제대로 못 마시고 나올 지경이었지요.

그리고 그게 너무나 화가 났던지 집에 와서는 '이게 무슨 결혼기념일이야. 모두 엉망이잖아'라고 짜증나는 한 마디를 던진 다음 며칠 동안을 삐쳐있었습니다. 작년 일을 잘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번만큼은 잘 해야겠다고 내심 마음을 먹었습니다.

1년 전과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메뉴

"당신 뭐 먹고 싶어?"
"그냥 집에 가서 식사해요. 자꾸 돈 쓸려고 하지 말고."
"무슨 소리야? 그래도 오늘만큼은 외식 흉내를 내 봐야지."
"그냥 애들 좋아하는 돈가스나 먹으러 가요."
"그래도 이런 날엔 돈가스보다 뭔가 특별한거 먹어야 되지 않겠어? 넌 뭐 먹고 싶니?"

큰놈에게 묻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돈가스 타령을 합니다. 막내에게 묻자 막내도 똑같이 돈가스를 찾습니다.

"너희들 돈가스 말고 더 맛있는 거 얘기해봐. 오늘은 아빠가 무엇이든지 사줄 테니 말이야."

오랜만에 호기를 부리는 내 말에 큰녀석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합니다. 내가 더 맛있는 걸 생각해 보라고 다시 한번 채근하자 녀석은 자장면을 찾았습니다.

한 번 더 물어보았다가는 라면이라고 말을 할 것 같아 올해도 작년과 다름없이 우리가 연례행사처럼 찾아가는 경양식 집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내가 어디 근사한 음식점을 알고 있었다면 모를까 나 또한 그런 곳은 알지 못했기에 그저 익숙한 곳을 찾아 간 것입니다.

우리는 작년과 똑같이 창문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작년과 동일한 가격에 작년에 주문했던 메뉴 그대로 그 식당의 정식 두 개와 어린이 정식 하나를 주문했습니다.

그럼에도 얼핏 아내의 표정을 보니 아주 만족해하는 듯합니다. 역시 아내가 바라는 선물의 힘이 효력을 발휘하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창문 밖으로 바다가 조금 보일 듯한 식당에서 지금까지 좀처럼 경험해 보지 못한 저녁식사를 조용하면서도 깔끔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돈을 기저귀랑 찬거리 샀어?"

후식으로 나온 주스를 마시면서 아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물 받은 걸로 뭘 사고 싶어?"
"글쎄, 뭘 살까요. 예쁜 치마나 하나 장만해 볼까."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는 아내의 말이 어쩐지 장난처럼 들립니다. 그 순간 나는 아내가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뚜렷하게 정한 게 없어서 그런 식으로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슈퍼에 들렀습니다. 당장 내일 아침 찬거리가 없다면서 금방 장을 보고 오겠다고 합니다. 아내의 그 말을 듣자 어느덧 결혼기념일의 화려했던 시간들은 벌써 저만큼 흘러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금 있다 돌아온 아내의 두 손에는 막내놈 기저귀보따리부터 시작해서 찬거리가 한 가득 들려 있었습니다.

"뭘 그렇게 많이 샀어?"
"애 기저귀하고 우리 먹을 찬거리가 전부예요."
"설마하니 당신 옷 사입으라고 준 돈으로 찬거리 산 건 아니겠지?"
"……."
"정말 그 돈으로 샀어?"
"그럼 월급날이 가까워지는데 내게 그거 말고 무슨 돈이 또 있겠어요?"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아내가 어느새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아줌마가 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보다도 아이들과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 아내의 모습이 조금은 답답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내의 그런 모습이 지금 아내가 가진 매력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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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기자'라는 낱말에 오래전부터 유혹을 느꼈었지요. 그렇지만 그 자질과 능력면에서 기자의 일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에 대한 의구심으로 많은 시간을 망설였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끝에 내린 결정은 일단은 사회적 목소리를 들으면서 거기에 대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생각도 이야기 하는 게 그나마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필요치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습니다. 그저 글이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고 책임감있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있는 글쓰기 분야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일상의 흔적을 남기고자 자주 써온 일기를 생각할 때 그저 간단한 수필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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