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솎기하면서 욕심도 솎았습니다

원경고, 농가 일손 돕기 봉사활동 펼쳐

등록 2005.05.21 11:45수정 2005.05.2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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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계절 오월, 경남 합천의 대안학교인 원경고등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황정리 들판은 지금 농사를 짓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바쁩니다. 논을 갈아엎고 물을 대는 논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논둑에 풀을 베는 예초기 소리도 들립니다. 다 자란 양파 수확을 준비하기도 하고, 밀, 보리도 푸른색이 점점 가시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요즘이 한창 보리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때였겠지요. 바야흐로 농번기입니다.

a 감나무 밭에 들어가 감 솎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원경고 학생들

감나무 밭에 들어가 감 솎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원경고 학생들 ⓒ 정일관

농촌 들녘에 터를 잡고 있는 원경고등학교도 지난 20일, 감 생산 농가의 요청을 받아 감 솎기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대안학교가 대체로 그렇듯이 원경고등학교도 봉사활동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신입생들의 입학 전 과제물로 꼭 봉사활동이 들어 있으며 올 3월에는 음성 꽃동네 봉사활동을 2박 3일 다녀왔고, 6월에는 소록도 봉사활동을 4박 5일 예정하고 있습니다.

a 감밭 주인 아저씨께 감 솎기 요령을 배우고 있다.

감밭 주인 아저씨께 감 솎기 요령을 배우고 있다. ⓒ 정일관

그리고 학생들은 거의 매일 기숙사와 학교를 청소하고 있습니다. 또 농업 시간을 이용해 각종 노작 활동을 하고 있고 봄가을로 농촌 일손 돕기 봉사활동을 시행해 오고 있던 터라 원경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봉사활동이란 일상적인 교육 활동이나 다름없습니다.

a 감 솎기를 하는 3학년 학생들

감 솎기를 하는 3학년 학생들 ⓒ 정일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조금 이른 시간에 전교생은 봉사활동 장소로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학교 뒤 평산 마을을 지나고 있는데, 마을 할머니 한 분이 학생들의 질서 정연한 이동을 보고 놀라 물었습니다.

"학교 학생들인교?"
"예. 할머니."
"아이고, 참 많다."
"예, 할머니 100명이 넘습니다."
"참, 좋네 좋아. 근데 어딜 갑니꺼?"
"요 건너 감나무 밭에 감 솎기하러 갑니다. 봉사활동요."
"아항, 감 소꾸로!"

a 감 솎기를 하는 2학년 학생들

감 솎기를 하는 2학년 학생들 ⓒ 정일관

할머니의 표정에서 아이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는 눈길을 보았습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끊어졌다는 요즘 농촌에서 할머니는 이만한 아이들이 농촌 마을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하고 든든해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번 봉사활동도 비록 농가에 많은 도움은 못된다 할지라도 이 정도의 넉넉함과 든든함은 드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a 감 솎기를 하는 1학년 학생들

감 솎기를 하는 1학년 학생들 ⓒ 정일관

찻길 하나를 중심으로 감나무 밭은 양옆으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농가의 주인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그 찻길에 모두 앉아 감 솎기 요령을 배웠습니다. 감나무의 여러 가지 가운데에 세력이 좋은 가지에는 감꼭지를 두 개 남겨 두고, 여타 세력이 약한 가지에는 감꼭지를 한 개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따버리라는 것입니다. 만일 모두 남겨 둔다면 영양분이 분산되어 감이 매우 잘아지고 맛도 없어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는, 감 솎는 이유까지 곁들여 아이들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a 새색시 같이 단아한 감꽃

새색시 같이 단아한 감꽃 ⓒ 정일관

학년별로 세 군데의 감나무 밭을 맡아 감 솎기를 하였습니다. 새색시 같이 단정한 감꽃이 막 피어나는 감꼭지가 감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감꼭지들을 하나 또는 두 개를 남기고 떼어내려고 하니 한편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미련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될 일이었습니다.

a 감 솎기하는 아이 1

감 솎기하는 아이 1 ⓒ 정일관

아이들은 감나무 밭에 들어가니 즐거운 모양입니다. 감나무 그늘도 있지,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일도 아니지, 친구들끼리 모여서 얘기 나누며 감꼭지만 똑똑 떼 내는 것이라, 작년 땡볕 아래서 땀 뻘뻘 흘리며 작업했던 양파 수확보다 더 수월하여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습니다.


그 중에 특히 물색 모르는 일 학년 아이들은 따낸 감꼭지를 모아 친구들에게 던지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그저 풀밭에 앉아 쉬려고 하여 선생님들은 작업의 어려움보다 그 아이들 일 시키는 일이 더 힘들어했습니다. 옛날 속담에 '종 부리려 하다가 종의 종노릇한다'는 말이 딱 맞았습니다. 일머리도 없고, 순서와 요령도 전혀 없는 아이들을 일 시키려고 하다가는 시키는 일이 더 힘드니 말입니다.

a 감 솎기하는 아이 2

감 솎기하는 아이 2 ⓒ 정일관

그러나 3학년 학생들은 다릅니다. 어떤 한 범위를 지정해 주면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수월하게 작업을 해 냅니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그래도 세월은 무시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뉴월 하루 땡볕이 무섭다는 속담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1학년 아이들도 세월이 가면 일머리도 익히고 순서와 요령도 익혀, 말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제 일을 할 줄 아는 든든한 3학년으로 성장할 것이니 말입니다.

한 순간에 아이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고질적인 욕속심(欲速心)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정성과 관심의 끈을 놓지 않은 채 기다려 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갖추어 나간다는 믿음이 더욱 필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감 솎기를 하면서 저는 제 마음 속에 웅크린 욕심도 솎아내고 싶었습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감 속에 녹아들어 가을날 굵고 달콤한 단감으로 매달려 가지가 휘어지기를 아이들과 함께 염원했습니다.

a 감나무 밭에서 원경고 여학생들

감나무 밭에서 원경고 여학생들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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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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