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에서는 '풋풋한 풀내음'이 난다

[이사람]농사꾼 출신 시인 이시일

등록 2005.05.21 12:16수정 2005.05.2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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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책 하고는 인연이 멀었던 시골 어중개비

a 환한 웃음으로 기자를 반기는 '시인 이시일'

환한 웃음으로 기자를 반기는 '시인 이시일' ⓒ 전영준

시인 이시일-
1949년 기축(己丑)생, 하마 인생 60고개를 바라보는 이 이가 이녁의 이름 뒤에 '시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월간 '한맥문학' 1999년 4월호를 통해 비로소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으니, 그가 시인으로 행세한 세월이래야 이제 6년이 살풋 넘었을 뿐이다.

근본이 농사꾼인 이시일은 자신을 일러 '본시 책 하고는 인연이 멀었던 시골 어중개비'라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시인 이시일'의 어린시절은 그저 평범한 시골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어릴 적부터 문재(文才)가 번득여 각종 '글짓기대회'를 휩쓸었다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한낱 시골구석의 철부지였을 뿐인 어린 시일은 그런 것과는 애시당초 거리가 멀었다.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가 안태고향인 그는 지금도 화제에서 살고 있는 화제 토박이다. 항상 먹고 사는 일이 팍팍했던 시골생활에 하는 일이라고는 학교 갔다 와서 책 보따리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소꼴 베러 들판이나 산자락을 헤매지 않으면, 논밭 일에 매달린 어른들을 대신해 어린 동생 뒤치다꺼리하기가 고작이었다.

그러니 그런 촌아이에게 앞날에 대한 무슨 대단한 꿈이 있었으랴. 그저 날마다 바라보는 화제들과 낙동강 줄기가 세상의 전부요, 주어진 하루하루가 삶의 모두였을 따름이다.

다만 중학교 다니던 한 때 원예가를 꿈꾸어 보았으나,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탓에 중학교 졸업으로 학교생활을 종쳐버리는 바람에 그마저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젊은 한 때는 4H클럽활동을 하면서 농촌계몽운동에도 뛰어들어 봤지만, 그의 나이 스무 살 전까지는 가난하고 막막한 시골생활이 지겹고 갑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 나이 20 전은 수치로 얼룩졌지 / 이 나라 태어남이 그렇고 / 그 보다 더한 설움 화제땅 촌넘이라 / 농 삼아 내 아버지 원망은 진심이지 // 나 이제 그 시절 씻은 듯 잊고 / 이 보다 더한 나라 이 고향 있을런가 / 한낮에 정자 밑 벗들 함께 청하고 /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감이 성스럽네 // 고향에 사람아 개발됨을 재촉마라 / 내 터전 내어주면 뉘갈데 어디런가 / 내 같이 놀던 동무 산천초목 버림받고 / 근거 없는 홑씨 되어 어디서 서성일까
- '고향' 전편 -

스무 살 뒤로는 철이 들었다는 말일까? 지금은 오히려 대처로 나가 '근거 없는 홑씨 되어 서성이고 있는' 어릴 적 동무들이 안쓰럽다. 그리고 급작스러운 도시화의 삽질에 군데군데 파 뒤집혀도 개발의 뒷전에 밀린 화제리는 아름다운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그 또한 고마운 일이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시인이 된 것일까?
"암만캐도 전생의 업이 아이(아니)겠나 싶은 기라. 본시부터 내 의식의 저 밑바닥에 내장돼 있던 아뢰야식(심층심리적ㆍ무의식적 인식)이 인자사(이제) 표출된 거라고 생각해 보는 것 말고는 지(저)도 내가 시인이 된 거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십니더."

1997년에 한 지인의 청으로 '대한법사회 불교대학'에 입학한 것이 계기가 되어 2년 과정의 불교대학을 수료하고 시방 한창 불교사상에 심취해 있는 그는 이녁이 시인이 된 것을 전생의 업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나에게 우째 이런 일이…'

젊은 시절, 포부가 남달랐던 그는 농사든 무엇이든 턱없이 크게 벌여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였다. 오죽하면 친구들조차 '시일이가 하는 대로만 따라하지 않으면 성공한다'며 비아냥 거렸을까.

그러나 마흔이 넘어 우연찮게 손을 댄 조경사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한숨을 돌리려던 참에 또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내 겨우 이루어 놓았던 것을 탈탈 털어버려야 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이시일이 아니었다. 다시 지친 몸을 추스르고 일어 선 그는 자신의 사업을 업그레이드 시킬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전라도 모처로 달려갔다.

"여관방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데 잠은 오지 않고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데요. 큰집 생이(형)가 내보고 다리 밑에서 주서 왔다고 놀리던 일하며, 밭에 나가 고구마 캐던 일, 소꼴 베던 일, 어린시절 동무들과 어불려(어울려) 온갖 호작질(장난질) 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기라. 그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이에다 떠오르는 상념들을 글로 옮겨보았어요. 그렇게 긁적거려 놓고 보니 '시' 비스무리한(비슷한) 것이 되데요."

그것이 곧 시인 이시일이 시작(詩作)을 한 첫걸음이다. 그 뒤로 틈날 때마다 써 나간 것이 스무 편이 되고 서른 편이 되다가 나중에는 100편, 200편이 넘어섰다. 그러던 차에 마침 불교수련회에 참여하고 있던 '한맥문학사'의 이사 한 분이 이시일의 습작 노트를 눈여겨보고 그 중에 몇 편을 골라 월간 '한맥문학'에 추천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 우째 이런 일이…' 그는 갑작스러운 자신의 변신에 놀랐다. 누가 '자고 나니 유명해 져 있더라'고 말했던 것처럼 농사꾼 이시일도 어느 날 그렇게 시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시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나서 날로 시적 내공이 쌓여가는 이 신출내기 시인은 2000년 여름에 첫 시집을 내고 2002년에 가을에 또 다시 두 번째 시집을 냈다. 그 사이 지역의 문학단체인 '삽량문학회'에도 가입해 여러 글벗들도 사귀고 있다.

a '체험과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이시일 시인의 시집 1집과 2집

'체험과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이시일 시인의 시집 1집과 2집 ⓒ 전영준

그는 시를 쓰면서 공연히 태깔을 부리지도 않고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는다. 일상에서 또는 이녁의 생활 주변에서 시어들을 길어내고, 지나간 고난의 세월을 반추하며 그를 글로 옮기니 그것이 곧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 이시일의 시에는 풋풋한 풀내음이 나고 곰삭은 장맛이 난다.

홰가 나게 호롱심지 돋우어 놓고 / 양손 엄지손톱으로 이잡기 한다 / 굵은 이 몇 마리 세가리는 수도 없어 / 뒤집은 실밥사이 호롱불에 지지기도…
- '디디티 이잡이' 일부 -

지난날 호롱불 밝혀두고 이를 잡던 그 청승스러운 일조차 시인의 손을 거치면 시가 된다.

밥반찬 / 술안주처럼 / 입에 달고 하는 말 // 기분 좋아서 씨-바 / 골난성질도 씨-바…
- '시팔' 일부 -

장삼이사 말살이의 한 부분인 욕지거리도 시가 된다. 담배도 시가 되고 사과쪼가리도 시가 된다. 이렇듯 무엇이든지 글감으로 삼아 시를 빚어내는 시인 이시일은 천생 타고난 시인인가 보다.

"나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으니 좋고, 글을 쓰면서 삼매에 들 수 있으니 이보다 더한 참선이 있을까 싶어 좋네요. 늦게나마 이런 즐거움을 가질 수 있어 참말로 복시러븐(복스러운) 일이지요."

시작 틈틈이 쓰고 있는 수필과 칼럼을 정리해 책으로 엮어볼 계획이라는 그에게 문학은 자신으로 하여금 세상과 소통하게 하는 매개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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