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문(軍門)에서나 사용하는 충차(衝車:성문을 부수기 위한 전차의 일종) 형태로 삼 사장에 달하는 아름드리 거목의 전면을 뾰쪽하게 깎아 십여 개를 엮어 실은 마차 두 대로 와호령의 입구인 천장대(天丈臺) 협곡 좌우에 배치한 것은 육능풍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두 대의 마차를 확실하게 분리시키고자 사용된 것이었고, 지형과 더불어 아주 적절한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었다.
협곡의 좁은 길로부터 넓은 평지로 나오는 그 순간을 기다려 좌우에 배치된 충차 형태의 마차 두 대를 돌진시킬 예정이었다. 상대의 선두마차와 두 번째 마차 사이를 가르려면 정확한 시간안배가 필요할 터였다. 그렇게 갈라놓고 나면 상대하기 훨씬 쉬울 것이다. 뒤따른 마차의 상대들은 추관과 그의 수하들이 초산과 함께 시간을 끌어줄 것이고, 앞 마차의 상대는 자신들이 상대해 빨리 끝내면 될 것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달려오는 마차의 속도를 감안해 충차 역시 출발시켜야 할 것이었다. 이미 아래에서는 자신의 손짓만 기다리고 있었다.
두두두두----
좁은 협곡 임에도 두 대의 마차는 거칠 것 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마차를 모는 마부들이 뛰어난 기술을 가진 것 같았다. 선두 마차를 끌고 있는 네 필의 건장한 말들도 다른 털이 섞이지 않는 검은 빛깔의 오룡마(烏龍馬)였고, 마부도 전신이 시커먼 곤륜노(崑崙奴)였다. 머리카락을 밀어버려 맨질맨질한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언젠가 장안 외곽에서 섭장천이 타고 있던 마차를 몰던 그 마부였다.
육능풍의 올라가 있던 손이 어느 한순간 빠르게 내려졌다. 그 신호로 아래에 대기해 있던 두 대의 충차 모양의 마차가 협곡 입구 쪽으로 무섭게 돌진을 시작했다. 시간적으로 약간 오차가 난 것일까?
콰--쾅---!
굉음을 울리며 충차 형태의 마차는 달려오던 첫 번째 마차의 중간을 부셔놓고, 뒤따르던 마차를 박살나게 만들었다. 동시에 육능풍을 비롯한 철혈보의 인물들이 몸을 날렸다. 헌데 이상했다. 첫 번째 마차의 절반을 부셔버리고 두 번째 마차의 말들을 피 곤죽으로 만들어 놓은 것 까지는 좋았다. 달리는 속도에 두 번째 마차가 완전히 부셔져 버린 것도 육능풍의 의도에 너무나 부합되는 일이었다.
그 충격에 타고 있던 인물들은 죽거나 부상을 당했을 것이고, 살아 있더라도 그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처음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효과가 컸다. 육능풍은 흡족한 미소를 짓다가 눈을 치켜떴다.
"……!"
하지만 보이는 모습은 그의 웃음을 짓이겨 놓았다. 박살낸 마차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비어 있었다. 두 번째 마차를 몰던 인물은 충격에 나동그라져 피를 쏟고 있었지만 첫 번째 마차는 중간부터 부셔져 바퀴가 떨어져 나갔음에도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땅을 끌면서 내달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덜렁거리며 지면에 끌리며 나아가던 반쪽 마차가 떨어져 나가고 시커먼 곤륜노는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말꼬리를 잡더니 말 등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마차를 모는 솜씨 뿐 아니라 말 타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결과에 그를 쫒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미 곤륜노는 자욱한 먼지를 날리며 와호령의 벌판을 무섭게 도망가고 있었다. 육능풍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씁쓸한 고소가 입 꼬리에 매달렸다.
"깨끗하게 당했군."
언제 빠져 나간 것일까? 오늘 새벽까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 쉴 새 없이 그들의 속도를 늦추면서 이곳에 와 미리 모든 준비를 점검했다. 언제 그들 일행 모두 마차에서 빠져 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분명 두 군데 중 한군데에서 그들과 정면 승부를 할 것이라 예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일행에는 섭장천이 있었다. 섭장천은 설사 죽더라도 그런 승부를 피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늙으면 겁도 생기는 것일까? 아마 그들은 우회했을 것이다. 이제 다시 추적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자칫하면 역습을 받을 수 있었다.
"돌아가도록 하지."
그는 반당과 진독수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그들과는 곧 엄청난 전면전을 벌이게 될 것이었다. 철혈보가 나서지 않아도 구파일방에서 선두에 설 것이었다. 무림의 공적이라는 시검사도는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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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깔리면서 세우(細雨)가 내리기 시작하자 산길은 제법 미끄러웠다. 조금 더 추워지면 눈발이 날릴 터였다. 그들 사이에서는 소일(少一)이라 불리는 그는 화삼(華三)과 공칠(空七)을 동반하고 우회해 와호령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마 그들 앞에 제법 감산도(甘山刀)를 휘두를 줄 아는 산도적 놈과 그 수하들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소일이 짐짓 근엄한 모습을 하고 그들을 훈계하려 들지만 않았어도 어둠을 틈타 피할 수 있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양민을 괴롭히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버릇을 고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법 감산도를 휘두르며 덤비는 산도적의 수괴 놈의 감산도에 주먹을 뻗었고, 일성(一成) 정도의 탄자권은 생각했던 대로 도를 잡은 손목뼈부터 어깨뼈까지 몇 군데 부러뜨려 놓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도를 떨어뜨리고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흔들며 뒤도 안돌아다 보고 수하들과 함께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 그들을 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들의 운은 끝났고, 그들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날을 맞았다.
"아미타불…!"
어둠 속에서 범종(梵鐘)을 치는 듯한 불호가 그들의 고막을 찢을 듯 파고들었다. 그 소리에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동시에 그들은 전면에 나타난 세 명의 승려와 한명의 노개(老丐), 그리고 두 명의 도포를 걸친 인물들을 보았다. 광지선사 일행이었다. 달마원(達磨院) 소속의 혜광(惠光)과 혜정(惠瀞)이 뒤따르고 파옥노군 규진과 자하신검 정무가 모습을 보였다. 홍칠공 노육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주는 누구기에 본파의 무공을 익혔음인가?"
소림의 무공을 사용하는 자가 나타났음은 이미 여러 번들은 소리였다. 소림 뿐 아니라 구파일방의 비기를 익힌 자들이 함께 나타났다는 말도 들었다. 그럴 리 없을 것이라 하였지만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개방의 정보를 토대로 철혈보와 다르게 그들 뒤를 추적한 것이다.
승도 속도 아닌 모습의 소일은 이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훔쳐 배운 것도 아니었고, 이미 소림을 떠난 분에게 배운 것이되 어느 순간부터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은 아니었다. 분명 발각이 되면 구파일방에서 가만있을 것도 아니었고, 그 점은 이를 가르친 분이 분명하게 선을 그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광지선사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기회가 닿아 익힌 것일 뿐 변명은 하지 않겠소."
소림에 입문한 바 없다하나 엄격히 그 맥을 따진다면 광지선사는 자신의 사숙뻘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사정을 말한들 이들이 인정해 줄 까닭이 없었다. 더욱 분명한 것은 익힐 때는 분명 정당하였고, 그 당시 사용했다면 소림에서 왈가왈부할 것도 아니었지만 이제 그 정당성이란 것이 사라져 변명할 수 없는 것이다.
태도에 비굴함이 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소일을 보며 광지선사는 나직하게 탄식을 터트렸다.
"시주는 본파의 계율(戒律)을 들은 바 있소?"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떡였다. 자신을 가르쳐 준 그 분은 자신이 이 길을 선택하자 분명 말씀하신 바가 있었다.
- 너는 앞으로 소림의 무공을 사용하면 안 된다. 소림인이 아닌 자가 소림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조직에 속해 있을 때뿐이다. 네가 이 조직을 떠난 후에 소림의 무공을 사용한다면 소림에서 반드시 회수해 갈 것이다. -
그리고 그 회수하는 방법 역시 참근절맥(斬筋切脈)의 형(刑)으로 쇄골(鎖骨)을 부러뜨리고, 아홉 군데의 근육을 자르며, 일곱 군데의 대혈(大穴)을 폐혈 한다. 그것은 소림의 무공을 익힌 자가 대죄를 지어 파문을 당할 때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다른 문파 역시 거반 다르지 않은 터.
"알고 있다니 다행스런 일이오. 시주 스스로 전신 혈맥을 끊고 사죄를 하겠소? 아니면 노납이 형을 집행하리까?"
어차피 이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번 일을 위하여 동행할 때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소림의 무공을 익혔으니 언젠가 반드시 올 일이었다. 하지만 강하다면, 소림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지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철없는 생각이었지만 그 마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어차피 다른 무공을 익혀 실력이 모자라 죽으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불편하시겠지만 본인으로서는 선사의 명을 받들지 못하겠구려. 능력이 있으시다면 회수해 가시라는 말 뿐."
그는 말과 함께 두 다리를 엇갈리게 하여 단단하게 바닥에 붙이며 오른 손은 뒤로 하여 비스듬히 하늘을 향하고 왼손은 약간 바닥으로 기울게 한 채 앞으로 뻗었다. 소림권법의 상승자세. 기의 흐름과 운용이 벌써 완벽하게 기틀이 잡혀 있었다.
"아미타블…!"
광지선사는 애잔한 빛을 띠우며 불호를 외었다. 소일의 자세를 본 그의 머리에는 젊어서 소림을 떠난 두 사형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광법(光法)과 광정(光正)이라 불리던 두 사형은 어느날 갑자기 파문을 당했고, 말없이 떠났다. 하지만 그 후 그는 그들이 왜 떠나는지는 알게 되었다. 광정사형이 가르친 아이일 것이다. 광정사형의 권에 대한 집착은 놀라웠으니까….
"어차피 본사로 시주를 데려가긴 해야 하니…."
광지선사는 본래부터 무승(武僧)이 아니라 학승(學僧)이었다. 굳이 무승과 학승을 구별할 일은 아니었지만 무경(武經) 보다는 불경(佛經)이 먼저였고, 그로인해 그는 장경각을 맡게 되었다. 경전(經典)의 해석에 있어서는 소림 뿐 아니라 중원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터. 하지만 그에 따른 깨달음은 광무선사에 못지않았다. 다른 것은 그의 손속이 언제나 부드러웠다는 점이었다.
그 옆에서는 그와 비슷한 상황이 파옥노군 규진과 매화검법을 펼친 적이 있던 화삼이란 사내 간에도 벌어지고 있었다. 다만 성급한 파옥노군은 광지선사와 같이 세세한 것을 묻지 않고 손을 먼저 썼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일이었다.
공칠이란 공동파(崆峒派) 무공을 익힌 사내 역시 소일이나 화삼과 다르지 않았다. 홍칠공 노육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운이 없었다.
(제47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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