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89회

등록 2005.05.24 07:53수정 2005.09.19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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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 장 천(天)

겨울비의 감촉은 차가왔다. 옷을 적시고 스며드는 습기는 부지런히 걸으면 익숙해질 만도 하련만 마음마저 울적한 그에게는 뼈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게 했다. 더구나 산등성을 타고 휘몰아치는 바람은 비를 이리저리 날리게 하여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어둠이 잦아들면서 추워지기 시작하자 비는 조금씩 눈이 섞여 날리기 시작했다. 곧 눈으로 바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비는 우설(雨雪, 진눈깨비)로 바뀌어져 있었다.


개봉의 북쪽에 위치한 용화사(龍華寺)는 매우 외진 곳이었다. 이백여년의 전통을 가진 용화사가 대찰(大刹)로 알려지지 못한 것은 그 규모 자체도 매우 적었을 뿐 아니라 찾아오기에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개봉에서 거의 걸어서 꼬박 반나절이나 걸리는 이곳을 찾아오려면 하룻밤 묵어갈 생각이어야 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찾아올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특별히 영험한 부처님을 모시는 것도 아니고, 대웅전(大雄殿)만이 그럴듯한 형체를 갖추었을 뿐 도장(道場)이나 선방(禪房)이 따로 마련된 것이 아니어서 묵고 가기에도 불편하였다. 오래된 사찰인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다. 대웅전 뒤 좌우로 삼 사장 정도 깎아지른 절벽 위에 두개의 암자가 그림처럼 지어져 있다는 것이 유일하게 볼 것이라면 볼 것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겨울비가 내리고 서서히 눈발로 바뀌는 상황에서 낮도 아닌 해가 저문 시각에 용화사를 찾는다는 것은 고찰을 전전하는 학승(學僧)이거나 불심(佛心)이 깊은 불자(佛子)가 아니고서야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도 제법 모초(茅草)로 만든 사의(蓑衣)를 걸치고 사립(蓑笠)까지 쓰고 있으니 우장(雨裝)은 제대로 갖춘 모습이었다.

그는 낡은 기둥으로 세워져 있는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용화사의 천왕문이 보이자 처마 밑으로 다가가 몸을 움직여 빗물을 털어냈다. 우설이어서 그런지 반쯤 언 물기가 빛을 받아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천왕문(天王門)은 제석천(帝釋天)을 받드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을 모신 곳. 사대천왕은 욕계육천(欲界六天)의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나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하는데 죄를 진 사람은 똑바로 보기 힘든 무서운 모습이다.


나무로 깎아 만든 목상(木像)이지만 그 발아래 깔려있는 흉측한 마귀(魔鬼)와 나찰(羅刹)들은 고사하고, 들고 있는 지물(持物) 역시 검(劍), 비파(琵琶), 탑(塔), 용(龍)이어서 예사롭지가 않다.

특별히 불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불덕이 높은 고승(高僧)으로부터 강론(講論)받은 바도 없었으니 불자(佛子)라 할 수도 없었지만 남의 집에 들어가도 주인에게 예를 표하는 법인데 사찰에 들어가며 예를 드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그는 양쪽에 서있는 사대천왕상을 향해 손을 합장하고 예를 표했다.


하지만 그 순간 목상으로 만든 지국천왕의 검이 내려쳐지고, 증장천왕이 들고 있던 용(龍)이 독사로 변하여 독아(毒牙)를 내밀며 그의 목을 물으려 쏘아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돌연한 사태에 정신을 차릴 사람이 있을까? 좁은 천왕문 내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변고는 그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앞뒤를 파고드는 공격에 그는 몸을 활처럼 누이면서 급하게 일곱 걸음을 떼었다. 그것은 그 좁은 공간을 뱅뱅 도는 것과 같았다. 사립이 베어져 나가며 귀 밑에 뜨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연이어 지국천왕상이 부서지며 나타난 흑의인의 검은 오른쪽 허벅지를 그었다. 불에 지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흡"

그는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문제는 독사였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 지탱하는 듯 아무리 피해도 허공에서 방향을 틀면서 그의 목을 노리는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에 어떠한 독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육장으로 내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속해서 베어오는 그의 하체를 노리는 검과 목을 물어뜯고 말겠다는 독사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그는 신형을 띠워 올렸다. 공중에서 한바퀴 돌면서 그는 잘려져 너덜거리는 사립으로 독사를 쳐내고, 날카로운 검기를 뿜으며 하체를 베어오는 흑의인을 향해 흩뿌렸다. 사립은 몇 줄기로 변해 흑의인을 덮쳐갔다.

슈우우---

사립은 본래 갈대로 만들어진 것. 그것이 흑의인의 검에 의해 베어지고, 독사를 쳐내느라 이미 뜯겨져 나온 것을 이용해 암기처럼 날린 것이다. 나뭇잎을 가지고 암기처럼 쏘아내는 적엽비화(摘葉飛花)의 수법과 같았다. 갑작스런 그의 수법에 흑의인은 급히 검을 쳐내 쏘아오는 갈대를 쳐내는 듯싶었다. 그 순간 담천의의 검이 뽑혀져 나오며 흑의인을 베어갔다.

"허--억--!"

흑의인의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터지며 왼쪽으로 굴렀다. 그의 어깨 살점이 뭉턱 베어져 나갔다. 허공에 선혈이 뿜어졌다. 하지만 그러한 필살의 검을 피했다는 것은 흑의인이 그만큼 임기응변의 능력이 뛰어난 자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하지만 담천의는 바닥을 구르는 그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뒷목을 물려고 쏘아오는 독사를 검배(劍背)로 쳐내며, 돌연 증장천왕상을 휩쓸어갔다. 독사를 검날로 베지 않은 것은 혹시 독기가 이 좁은 공간을 메울까 염려해서였다.

와지끈----

증장천왕상이 허리 쪽에서 베어져 옆으로 구르는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증장천왕상 뒤에도 흑의인이 있었는데 아마 독사를 조종하던 자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가슴이 쩍 벌어지며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갔다. 담천의가 이토록 돌연한 공격을 해 올지 예상 못했던 터라 꼼짝없이 당한 것으로 보였다. 이미 폐가 가로로 갈라져 피가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자가 숨을 쉴 수는 없었다. 주인을 잃은 독사는 바닥에 떨어져 비실거리고 있었다.

"……!"

하지만 어깨 살점이 베어졌던 흑의인은 그 틈을 타 어느새 천왕문을 빠져 나갔고, 경내로 들어서며 우설 사이로 사라져 갔다. 몸놀림 하나만큼은 귀신과 같은 자였다. 담천의는 황급히 경내로 들어섰다. 몇 개 세워진 석등은 이미 불이 밝혀져 있었지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쏟아지는 우설로 인하여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왼쪽에 승들이 머무는 선방이 길게 지어져 있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전면에 보이는 대웅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세 분의 부처님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다른 사찰과 다르지 않았다. 대웅전은 언제나 환하게 불을 밝혀 놓은 곳이어서 그런지 한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허리가 구부정한 노승이 예불을 올리고 있는 듯 전면에 앉아 있었다. 등을 보이고 있었는데 합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목탁을 들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노승을 향해 다가가면서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이미 죽었다.)

노승은 앉은 채 죽어 있었다. 자줏빛 가사를 걸치고 있어 이 용화사 주지(住持)로 보이는 그 노승의 목둘레에는 가는 혈선이 그어져 있었고, 그의 아랫배에는 비수가 박혀 있었다. 피가 가사를 적시고 바닥에 약간 흘러내려 방울방울 고여 있었다. 비수는 날이 있는 쪽이 위로 향하고 있어, 누군가가 노승의 뒤로 다가가 가는 줄로 그의 목을 감고 어깨 너머로 팔을 휘둘러 그의 배에 비수를 박은 것 같았다.

죽은 노승의 표정이 갑자기 놀란 듯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누가 다가왔는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목이 졸리고 죽은 것 같았다. 부처를 모신 신성한 대웅전에서 이곳 주지를 살해한다는 것은 감정이 없는 인간이거나, 독랄한 심성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바닥을 살펴보았다. 불빛에 비치어 미세하지만 말라붙은 물 얼룩이 몇 개 전면에서부터 좌측 쪽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분명 발자국 같았지만 그것은 발 앞꿈치만 사용했는지 아주 작은 족적을 남기고 있었다.

(살해당한지 꽤 되었다.)

반 시진은 족히 지난 것 같았다. 바닥에 방울져 있는 피는 어느 정도 굳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급히 대웅전을 나섰다. 아무리 작은 절이었다 하나 주지가 살해 된지 반시진이 지났는데도 다른 승려가 보이지 않음은 기이한 일이었다. 그는 승들이 머무는 선방 쪽을 향했다. 다섯 개의 방을 연결해 놓은 건물이었는데 선방의 첫 번째 문을 여는 순간 방안의 탁한 기운이 몰려나오며 그와 함께 짙은 피비린내를 풍겼다.

어둠 속에서 세 명의 승려가 피가 낭자한 채 죽어 있었다. 누군가와 드잡이 질을 하였는지 사방이 어질러져 있었고, 침상의 다리가 부러져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급히 두 번째 선방의 문을 열어 젖혔다. 두 번째 선방은 비어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세 번째가 비어 있어 급히 네 번째 선방의 문을 열자 두 명의 승려가 목과 몸이 분리된 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명의 승려는 상대에게 반항하지도 못한 듯 눈을 부릅뜨고 죽었는데 무언가 보는 순간 당한 것 같았다.

(그 놈들인가?)

천왕문에서 자신을 기습했던 두 명의 흑의인을 떠 올렸다. 도망간 흑의인의 무공수위는 충분히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살해한 시각은 자신이 이곳에 당도하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 이들을 살해하고 자신을 기습했다는 결론이었다.

(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는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개봉 난전의 옷가게에서 자신을 기습했던 인물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무슨 이유로 자신을 공격했을까? 그리고 이곳에서 이토록 끔찍한 살인이 일어난 것일까?

(우연인가? 아니면 나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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