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90회

등록 2005.05.25 08:09수정 2005.05.2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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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이곳에 올 것이라는 사실은 이곳을 가르쳐 준 섭장천만 유일하게 알고 있었다. 더구나 섭장천이라도 자신의 오는 시각을 알리는 없었다. 하지만 개봉 옷가게에서 자신을 기습한 자들과 천왕문에서 기습한 자들은 기이하게도 느낌이 비슷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용화사 이곳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신의 행적이 그들에게 낱낱이 파악되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온 목적을 이미 알고…?)

목적은 강중장군일 것이다. 지금까지 행적이 발견되지 않고 이곳에 은거한 그를 노린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의 마음이 급해졌다. 다섯 번째 선방은 비어 있었다. 그는 살해된 인물 중에 나이 든 사람이 있는지 생각했다. 강중장군이라면 지금 나이가 육순이 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웅전 안에 있던 노승 외에는 없었다. 이곳 주지로 보이는 노승이 강중장군이었을까? 하지만 주지로 보이는 노승은 이미 칠순이 다 되어 보였다. 그는 경내로 내려섰다. 이미 우설은 눈으로 변해 쏟아지고 있었다. 벌써 전각 지붕위에는 눈이 쌓이고 있었다. 산천과 나무들이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강중장군이 머물 곳이라면 어딜까?)

그는 경내를 비롯하여 주위를 세심하게 둘러보았다. 그 때 문득 그의 시야로 대웅전 뒤로 보이는 암자가 눈에 들어왔다. 절벽 위에 세워진 좌우 두개의 암자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눈이 내려서인지 그 절경이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토록 끔찍한 살인이 일어난 사찰에서 변함없이 저렇듯 아름다운 광경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었다.


(왜?)

그는 지독한 의문을 느꼈지만 이미 대웅전 뒤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암자로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눈이 쌓이기 시작했지만 발자국 같은 것은 없었다. 눈이 쌓이기 시작한지 일각 정도였으니 그 안에 올라간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도 되었다.


암자 쪽으로 올라가자 용화사 경내가 한눈에 보이고 먼 곳까지 보이는 듯 했다. 아마 어둡지 않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꽤 먼 곳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아래서 볼 때와는 다를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경치를 감상할 여가가 없었다.

참회암(懺悔庵).

조그만 암자의 편액에는 그렇게 써있었다. 그는 내공을 끌어 올려 주위를 살폈다. 조금 전 같이 언제 기습해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느껴지는 인적은 없었다. 그는 검을 든 채로 암자의 문을 열었다.

"……!"

향 내음과 함께 피비린내가 다시 또 그의 코를 찔렀다. 향 내음이 짙게 풍기기도 했지만 짙은 피 내음을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암자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이곳이 자신이 찾던 그곳임을 알았다. 너무나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바닥은 온통 피였다. 한사람의 피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암자의 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암자 안은 엉망이었다. 전면에 단을 놓아 사람의 반 정도 크기의 금불(金佛)을 모셔놓고, 그 앞에는 향로가 있었는데 이미 향은 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전면 바닥에는 한명의 노승이 큰 대(大)자로 똑바로 누워 있었는데 목에 걸었던 염주가 터졌는지 그의 주위로는 염주 알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나 정작 담천의를 주저앉게 만든 것은 한쪽 벽에 걸린 족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족자에 그려진 한사람의 초상이었다.

(아버님…!)

그의 가슴에 격동이 일었다. 분명 족자에 그려진 인물은 자신의 부친이었다. 돌아가실 때 보다는 젊은 듯 했지만 분명 담명장군, 그였다. 그렇다면 죽어있는 사람은 강중장군이 분명할 것이다. 그는 망연자실한 듯 넋을 놓고 물끄러미 암자의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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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겨우 여덟 살인 그 아이와 놀아주고, 안아주었으며 귀여워 해 주던, 그리고 가끔 어디서 났는지 과자까지 쥐어주던 스님들이 갑작스럽게 들이 닥친 흑의인들의 시퍼런 칼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며 아이는 침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그 아이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바닥을 울리는 진동에도 아이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아마 스님들이 말하던 악귀가 저들인가 싶었다. 울음이 터졌지만 아이는 또 다시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역겨운 피 냄새가 코를 찌르고 방바닥을 흐른 피가 그의 이마에 닿아도 그 아이는 움직일 수 없었다.

침상의 다리가 부러져 침상이 내려 앉아 자신의 어깨를 내리 눌렀어도 그 아이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멍했다. 아이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고 두려움은 그 아이의 모든 감각을 앗아가 버렸다. 공포에 따른 충격은 이미 그 아이의 혼백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자신의 바지에 오줌을 싸는 줄도 모르고 아이는 조용해지자 고개를 들었다. 피를 뿌리고 내장이 삐져나온 채 죽어 있는 스님과 목이 갈라져 기이한 각도로 머리가 돌아가 있는 스님이 보였다. 그러다 문득 아이의 눈과 문을 열고 나가는 두 명의 흑의인 중 한명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아이는 정말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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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이곳은 그가 찾던 곳이었고, 죽은 사람은 분명 자신이 만나려한 강중장군이었다. 사람들이 죽었을 때 죽은 사람을 보며 흔히들 큰 대자로 누었다고들 말한다. 강중장군은 정말 큰 대자로 누워있었다. 양팔을 몸과 직각으로 벌리고, 다리 역시 벌릴 수 있는 만큼 벌어져 인(人) 자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머리까지 똑바로 세운 채 죽어 있었는데, 표정은 기이하게도 죽은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해탈한 고승과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아마 살아있음이 지옥보다 더 한 고통이었다면 죽는 순간에 저런 표정을 지을 것이었다. 여기까지 찾아 온 것은 강중장군의 말을 듣기 위함이었다. 죽어 있는 강중장군을 보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허탈했다. 어쩌면 용화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살해된 것은 자신 때문일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자신을 노리는 자들은 자신의 뒤를 쫓다가 그곳이 용화사임을 알았을 것이다. 개봉에서 이쪽으로 오자면 목적지가 이곳 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들은 먼저 와서 모두를 죽이고 자신을 기습했을 것이다.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자신이 신검산장을 나와 이곳으로 오는 동안 왜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도저히 생각해도 감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개봉의 옷가게에서 기습을 했다면 그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여섯 명을 모두 죽이고 나자 이제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상대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칼을 들이미는 자들이었다.

그는 물끄러미 강중장군을 바라보았다. 누워있는 그의 앞쪽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아마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써 등 쪽에 치명적인 공격을 퍼부은 모양이었다. 깔고 누워있는 그의 가사에 피는 홍건하게 젖어 있었지만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렇듯 많은 피를 흘렸다면 등 쪽에 상처가 컸을 터였다.

(왜… 여기에 있었던 것일까?)

그는 정말 불가에 귀의(歸依)한 것일까? 아직 머리를 깎지는 않았으나 승복을 입고 있었다. 부처를 자신이 머무는 암자에 모셨으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런데 왜 자신의 부친 초상은 걸어 놓은 것일까? 초상 앞에 향대가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향을 피우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극락에 가시라고 향이라도 피워주고 염불이라도 올린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부친에게 잘못이라도 해서 용서를 빌었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이 암자의 이름이 참회암이었다. 자신의 부친이 죽은 후 강중장군도 사라졌다고 했으니 어쩌면 강중장군이 황제의 명을 어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부친을 죽인 것일까? 이렇듯 참회암이라는 이름의 암자를 만들고 부친의 영정을 모신 것은 그의 죄를 속죄키 위한 것이었을까? 그럴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 짓기도 어려웠다. 만약 강중장군이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당한 부친의 소식을 듣고 회의를 느껴 불가에 귀의 한 것이라면? 그리고 먼저 간 동료의 영정을 놓고 극락왕생을 빌어 준 것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헌데 왜 그는 저렇듯 평안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죽어 갔을까? 그렇다고 반항한 흔적이나 다툰 흔적도 없었다. 그저 누군가가 등 뒤로 다가와 그를 벤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물끄러미 바라보던 담천의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저것은…!)

--------------
아이는 눈을 떴다. 자신의 손과 얼굴이 질퍽질퍽했다. 깜깜한 방안이라 무서웠다. 여기가 극락일까? 지옥일까? 언젠지 모르지만 악귀의 눈을 본 것도 같았다. 머리를 바닥에 처박은 채로 혼절했던 아이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손에 묻은 무언가가 끈적거렸다. 그리고 그것이 냄새와 함께 피라는 것을 알았을 때 또 다시 아이는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언젠지 모르지만 이 방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스님들이 죽는 모습과 흑의를 입었던 그 악귀들, 번뜩이던 칼과 허공에 흩뿌려지던 선혈. 그리고 내장이 꾸역꾸역 밀려 나오고 방바닥을 흐르던 검붉은 피….

아이는 너무 무서웠다.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이 끔찍한 모든 것이 너무 무서워 꼼짝을 하지 못했다. 지금 이 방안에 시신이 되어 나뒹굴고 있던 스님들이 귀신이 되어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다. 자신을 귀여워해준 스님들이었지만 죽은 모습들은 흉신악살 같았다. 턱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 문득 아이는 누군가가 생각났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줄 것 같았던 한 사람.

- 귀신이란 마음이 약한 어리석은 사람에게만 다가온단다. 우리 명이(明二)는 사내대장부라서 귀신도 다가오지 못할게다. 만약 다가온다면 이 할애비가 혼내주마. -

그 아이는 자신을 안고도 산을 이쪽저쪽 날라 다녔던 장군 할아버지라면 무서움을 지워줄 것 같았다. 아이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쪽으로 기운 침상에서 틈이 있는 쪽으로 기기 시작했다. 끈적이고 미끈거리는 피가 아이의 옷에 자꾸 묻었지만 오직 장군 할아버지를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이는 무서움에 몸을 떨면서도, 그리고 몇 번 곤두박질치면서도 그 방을 빠져 나왔다. 장군 할아버지는 암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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