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를 사 왔는데 웬 낙지야?

낙지 한 마리의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등록 2005.06.01 08:07수정 2005.06.0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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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몹시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낙지와 문어를 분간조차 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요. 그래도 사실인데 어쩝니까.


어제 저녁이었습니다. 저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내에게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었습니다.

"여보, 이거 받아요."
"뭐예요?"

"문어란 놈이요."
"저는 낙지를 좋아하는데."

그래도 싫지 않은 표정입니다. 재빨리 비닐봉지를 열어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아내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산하 아빠, 이것 좀 떼 주세요?"


아내가 제게 팔을 내밉니다. 낙지 한 마리가 아내 손에 착 달라붙어 있습니다.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낙지의 망측함(?)에 놀란 게 아닙니다. 문어를 사왔는데 웬 낙지야? 저는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아하, 그랬구나. 저는 그제야 제 머리를 두어 번 쥐어박았습니다.

a 살아있는 낙지입니다

살아있는 낙지입니다 ⓒ 박희우

사연은 이랬습니다. 어제 저는 몸을 무척 피곤했습니다. 지난 토요일, 일요일 이틀 동안 우리 가족은 동해안까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바로 그제인 월요일에는 직장 후배 모친께서 편찮으셔서 시골까지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아마 그랬던 모양입니다. 피로가 누적되어 잠시 제가 깜빡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저는 피곤하면 꼭 문어를 먹었습니다. 문어를 살짝 데쳐서 초장에 찍어먹으면 거짓말처럼 피곤함이 싹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퇴근하자마자 마산어시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양동이에 담겨있는 물고기를 가리켰습니다.

"아줌마, 저거 한 마리에 얼마지요?"
"세 마리에 1만원 합니다. 방금 남해안에서 잡아왔습니다."
"싸네요. 저번에는 한 마리에 1만5000원 했습니다. 세 마리 주세요."

그렇게 사온 것이 알고 보니 낙지였습니다. 낙지하고 문어하고 언뜻 보면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격만 보고도 충분히 눈치를 챘을 수도 있었습니다. 평소의 아둔함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쓰름했습니다.

a 낙지를 접시에 담았습니다

낙지를 접시에 담았습니다 ⓒ 박희우

저는 아내 손에서 낙지를 떼어냈습니다. 지금부터 제 차례입니다. 저는 가위로 낙지다리부터 잘랐습니다. 꼼지락거리는 게 여간 군침이 도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낙지다리를 뜯어먹습니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게 맛이 그만입니다. 아내가 '그렇게 맛있어요?' 하지만 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제 준비가 끝났습니다. 우리 부부는 식탁에 마주 앉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초장이 좀 이상합니다. 색깔도 분홍색입니다. 초장 안에도 무언가가 들어있습니다. 아내에게 물으니 매실이라고 합니다.

"매실 장아찌를 좀 담았어요. 1년도 넘었으니 맛있을 거예요."

아내가 하는 말에 저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입에 오독오독 씹히는 게 여간 맛있는 게 아닙니다. 초장에 찍어먹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저는 아예 낙지를 매실 장아찌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하나씩 꺼내먹는 것도 별미입니다. 아내와 저는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당신 얼굴이 붉소?"
"그래요?"

아내가 거울을 봅니다. 순간 얼굴이 떠 빨개집니다. 저는 짐짓 모르는 체 하며 제 잔을 건넵니다. 그런데 오늘은 좀 이상합니다. 아내가 사양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웃음까지 칩니다. 순간 저는 야릇한 감정에 빠져듭니다. 엉뚱하게도 그 눈짓의 의미를 색다른 곳에서 찾는 것이었습니다.

a 매실 장아찌에 낙지를 버무렸습니다.

매실 장아찌에 낙지를 버무렸습니다. ⓒ 박희우

"여보, 내 가슴이 왜 이렇게 벌렁거리지요?"
"가슴에 병이 생겼나요?"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한번 만져보시겠소?"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저한테 오더니 가슴을 만져봅니다. 하하, 제가 어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저는 덥석 아내를 안았습니다. 아내가 몸을 뒤틀었습니다. 그러나 뒤틀림의 강도가 아주 약했습니다. 마치 낙지가 꼼지락거리는 것 같습니다. 가만 있을 작은놈이 아닙니다.

"언니야, 아빠가 엄마를 안았다."

그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요. 행복이란 게 별거 아니라는 생각 말이지요. 낙지 한 마리에도 이렇게 큰 행복이 담겨 있답니다.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도 한번 가져보지 않으시겠어요? 낙지 한 마리의 행복이 생각보다 꽤 쏠쏠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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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수필을 즐겨 씁니다. 가끔씩은 소설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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