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왜 그래요. 저도 거뜬히 올라가는데"

결혼 15년만에 처음으로 아내와 '모산봉'에 오르다

등록 2005.06.07 01:55수정 2005.06.0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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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6일 감자꽃
2005년 6월 6일 감자꽃김환희
월요일 현충일이 낀 이틀 간의 황금연휴가 시작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금요일 오후부터 일부 고속도로는 주말과 연휴 나들이 객으로 곳곳이 정체되고 있다고 하였다. 요즘 경기가 어려워 힘들다고 볼멘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뭇 사람들의 말을 비아냥거리기라도 하듯 연휴가 시작되면 서울을 떠나는 차들로 고속도로가 막힌다.


현충일 아침 8시, 자고 있는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 녀석을 깨워 국기를 달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세면을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녀석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모르는 듯 평소처럼 국기를 게양해 둔 것이었다. 할 수없이 나는 국기를 가져와 조기(弔旗)로 달아 게양을 하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녀석이 민망한 듯 계속해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2005년 6월 6일 노송의 웅장함
2005년 6월 6일 노송의 웅장함김환희
현관문을 열자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은 확 트인 아파트 주차장이었다. 평일에는 주차 전쟁을 벌여야만 이 곳이 오늘은 자동차 몇 대만 주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간대로 보아 모두가 하루 전에 어디론가 떠난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이 현충일인데도 불구하고 국기를 게양한 집이 몇 집뿐이었다. 이제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순국선열에 대한 넋을 기리기 위한 현충일이 단지 노는 날로 인식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오전 10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 있었다. 아파트 공터에서 놀고 있는 몇 명의 초등학교 아이들은 놀던 것을 멈추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듯 사이렌 소리가 끝날 때까지 묵념을 하였다.

2005년 6월 6일 산딸기
2005년 6월 6일 산딸기김환희
무엇보다 나는 어제부터 아내와 한 약속이 있었다. 그건 아내와 등산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 온 나와의 등산을 오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아내의 행동에서 읽을 수가 있었다. 아내는 산행을 위한 준비물을 챙기며 꾸물거리는 나를 향해 계속해서 주문을 했다.

"여보, 준비 다했어요? 그럼 어서 가요."


사실 아내는 체중 감량을 목적으로 동네에서 가까운 '모산봉'까지 매일 등산을 해 온 터였다. 나는 그곳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대충이나마 그곳에 대한 지형을 아내로부터 들어 짐작이 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그 지형은 경사가 완만하여 아이들뿐만 아니라 노인들까지도 쉽게 등산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2005년 6월 6일 고사리
2005년 6월 6일 고사리김환희
워낙 운동을 싫어하는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내인지라 지금까지는 등산을 함께 가자고 강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리 만큼 아내는 유난스러웠다. 아내의 고집에 못 이겨 똥 마른 강아지마냥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그렇게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심 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올 생각까지 하였다.


앞장 서 산을 올라가는 아내는 정말이지 선수였다. 나와의 간격이 1미터 이상 벌어질 때면 뒤돌아 서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하곤 하였다.

"남자가 왜 그래요? 여자인 저도 거뜬히 올라가는데. 자존심도 없어요?"

2005년 6월 6일 뱀딸기
2005년 6월 6일 뱀딸기김환희
아내의 말에 오기가 발동하여 힘든 것을 내색하지 않고 아내의 뒤를 따랐다. 산 중턱까지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휴식을 취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였다. 그래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올라가는 아내를 열심히 불렀다.

"여보, 조금 쉬었다 갑시다. 도저히 안되겠소. 당신도 내 나이 되어보구려. 제발 좀 5분만이라도 쉽시다."

아내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정상을 향해 계속해서 올라갔다. 앞서가는 아내의 뒷모습이 면전에서 사라질 정도로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아내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모처럼 찾아온 황금 연휴를 아내 때문에 다 망쳤다는 생각에 속상하기만 했다.

2006년 6월 6일 야생화
2006년 6월 6일 야생화김환희
더욱이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산의 경사가 심했다. 아내가 산에 오르기 전에 한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내심 아내에 대한 원망이 더 커져만 갔다. 이 자리에 아내가 있었으면 정말이지 심한 말까지 했는지도 모른다. 볼멘 소리를 빨리 해주고 싶은 생각에 더 힘을 내어 산을 올랐다.

간신히 '모산봉' 정상에 다다르자 아내는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다가와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 순간 만나자마자 해주어야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생각이 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내의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005년 6월 6일 싸리꽃
2005년 6월 6일 싸리꽃김환희
아내는 살을 빼기 위해 한 달 이상을 이 험한 산을 매일 등산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등산을 하면서 부부가 함께 산행을 하는 뭇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아내의 그 말에 왠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올라가야 할 산이 급경사라고 미리 이야기하면 내 성격으로 보아 따라 나서지 않을 것이 분명할 것으로 여겨 거짓말을 했다며 애교 섞인 말을 하였다.

하산을 하면서 아내와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카메라로 평소 마음에 두었던 야생화를 찍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결혼하여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한 산행이 뜻깊은 날인 현충일에 있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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