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얼굴을 찡그리니?

콩 가려내다 혼난 딸아이

등록 2005.06.09 08:19수정 2005.06.0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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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잡곡밥입니다. 쌀, 보리, 검은콩, 현미가 들었습니다. 밥에 윤기가 자르르 흐릅니다.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울 것 같습니다. 아내가 제 마음을 읽은 모양입니다. 밥을 고봉으로 펐습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어림없는 일입니다. 반 그릇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밥을 한 숟가락 떠먹습니다. 밥이 아주 고소합니다.


"아마 검은콩 때문일 거예요. 친정 어머님이 손수 농사지으신 거예요."

a 잡곡밥입니다

잡곡밥입니다 ⓒ 박희우

아내의 말에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디 검은콩뿐이겠습니까. 쌀도, 보리도 직접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반찬도 오늘따라 많습니다. 쌈 싸먹는 배추, 풋고추, 콩나물무침, 콩자반, 총각김치, 깻잎무침, 매실장아찌, 식초에 절인 마늘 등등.

아내는 아이들 음식을 따로 접시에 담아줍니다. 아이들 편식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게 싫은 모양입니다. 얼굴을 찡그립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반찬을 골고루 먹어야 튼튼해진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작은애가 밥에서 콩을 가려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지나칠 아내가 아닙니다.

"너, 왜 콩을 가려내니? 할머니가 얼마나 힘들게 농사지은 줄 아니. 밥 그릇에 담아!"
"먹기가 싫은 걸요."
"너, 정말!"

아내가 언성을 높입니다. 그제야 작은애가 움찔합니다. 슬그머니 밥그릇에 콩을 담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집니다. 아이들이 제 엄마 눈치를 살핍니다. 아내의 입 꼬리가 쭉 올라갔습니다. 아내는 화를 낼 때 입 꼬리를 올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작심한 듯 말을 쏟아냅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너희들 왜 그러니? 아빠가 얼마나 고생을 하시는데. 아빠는 아침 6시에 출근하면 저녁 7시나 돼야 집에 돌아오신다. 우리 가족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은 저녁밖에 없어. 아빠나 엄마나 너희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야. 그런데 왜 얼굴을 찡그리니. 그러면 아빠가 좋아하시겠니?"
"잘못했어요, 엄마."

아이들이 아내에게 잘못을 빕니다. 공연히 제 마음이 심란합니다. 저는 헛기침을 몇 번합니다. 아내는 더 이상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웬만큼 잘못해도 눈 감아주는 편입니다. 제가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이런 제가 못마땅한가 봅니다. 자꾸 '오냐, 오냐' 하니까 아이들 버릇만 나빠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오늘만이라도 아이들에게 잘해주고 싶습니다.

"애들아, 밥 먹고 인라인스케이트 타러 갈까?"

순간 아이들의 눈이 반짝 빛납니다. 얼굴에 기쁜 표정이 가득합니다. 저는 아내를 힐끗 훔쳐봅니다. 기분이 좀 풀렸는지 입 꼬리가 많이 내려왔습니다. 작은애가 밥을 한 숟갈 뜹니다. 아내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한 입 가득 밀어 넣습니다. 저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어야 합니다.

"여보, 오늘은 모두 다이어트 음식뿐입니다. 배추 쌈이 아주 좋아요."

저는 아내에게 배추 쌈을 싸줍니다. 아내는 못 이기는 척 받아먹습니다. 저는 된장에 고추를 찍어먹습니다. 그런데 고추가 여간 매운 게 아닙니다. 입안이 화끈거리고 눈물이 찔끔찔끔 나옵니다. 작은애가 재빨리 물을 떠옵니다.

"아빠, 드세요."

여간 재치가 있는 놈이 아닙니다. 저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습니다. 그제야 매운 기운이 조금 가십니다. 저는 작은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작은애가 아닙니다. 재빨리 제 귀에다 입을 갖다대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꼭 인라인스케이트 타러 갈 거지요?"
"그럼, 가고 말고. 자, 우리 공주들, 밥 맛있게 먹고 인라인스케이트 타러 가야지."

a 작은애 '산하'입니다

작은애 '산하'입니다 ⓒ 박희우

갑자기 식탁이 부산합니다. 냠냠, 쩝쩝. 밥을 먹고 나자 아이들이 신발장으로 뛰어갑니다. 헬멧을 쓰고, 보호대를 착용하고, 인라인스케이트를 신습니다. 아이들이 앞서 달려갑니다. 아내와 저는 그 뒤를 따라갑니다. 아이들이 한번씩 뒤를 돌아봅니다. 그때마다 아내와 저는 손을 흔들어 줍니다.

"여보, 창원 하늘에는 별이 왜 적은 줄 아세요?"

아내가 제게 묻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늘에 별이 얼마 없습니다. 며칠 전에 처가인 함양에 갔을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저는 아내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봅니다. 아내가 싱긋 웃습니다. 장난기가 섞여 있습니다.

"창원사람들이 별을 다 따먹었대요. 근데 있지요. 한사람당 별을 하나씩밖에 따먹지를 못한대요. 창원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별이 저렇게 적대요."
"응, 그렇구나. 함양 사람들이 창원 사람들보다는 확실히 적지. 그래서 함양 하늘에는 별이 저렇게 많았구나. 오늘 처음 알았네. 당신은 아는 것도 많소, 하하."
"호호, 그게 별에 관한 제 지식 전부예요. 더 묻지 마시어요, 여보."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인라인스케이트장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아내와 저는 느릿느릿 걸었습니다. 손도 잡고 팔짱도 끼었습니다. 어둠이 한꺼풀씩 우리들 머리 위에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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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수필을 즐겨 씁니다. 가끔씩은 소설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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