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흠뻑 품은 땅에서는 햐얀 김이 모락모락 연기처럼 피어 오른다.전희식
그러고 보면 단작 대규모 시설농들은 하늘의 뜻과 무관하게 사느니만큼 더 이상 천하의 근본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들에게 땅은 어머니로서의 모성이라기보다 이윤을 내는 생산재에 불과하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자 줄지어 기다리고 있던 농사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이번 주 목요일에 비 온대매?"
"한 사날 온다는구먼."
"큰 비는 아니고 찔끔거리다 만뎌."
"와 봐야 알지 그노무 일기예보 맞간디?"
똑같은 티브이 뉴스를 봤을 것이면서도 노인네들은 서로 다른 얘기하듯이 말한다. 하늘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하면 군소리 없이 서둘러 채비를 해야 한다. 따지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감히 하늘님이 하시는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지 않은가. 이것이 제대로 된 농심이기도 하다.
12년째 고집스레 비닐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 나는 비 오기 전에 끝내야만 하는 일이 많다. 주인의 눈총도 아랑곳 않고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는 감자밭 풀매기다. 한 벌 북주기는 했는데 벌써 여러 날 돼서 이번 비를 맞히지 않아야 한다. 풀매기는 때를 놓치면 일이 몇 배가 불어나 버린다. 괭이로 긁어주면 될 일도 호미로 풀뿌리를 캐내야 하고 보면 농사 망쳤다고 복창해야 한다.
비 온 뒤에 해야 할 일을 비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도 있다. 콩 심고 들깨 모 뿌릴 밭을 미리 갈아놓는 일이다. 비 오기 전에 씨앗을 넣을 수만 있다면 일이 훨씬 수월하지만 갈아놓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싶다.
비 온다는 소식에 분주해진 나는 새벽부터 일터로 나가서 밤이 이슥해져 호미자루인지 괭인지 분간도 못할 때까지 일을 했다. 말끔하게 감자밭 북주기를 끝내고 콩밭 이랑을 예쁘게 다 탔을 때 후둑 후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를 잔뜩 머금은 채 긴 시간을 기다려 준 하늘에 건성이지만 고맙다고 인사치레를 하고 이틀간 뒹굴뒹굴하다 비가 그친 새벽에 콩 자루를 메고 밭에 나갔다. 온 들판이 무슨 피난민 행렬처럼 논둑과 밭둑을 걸터타고 동네사람들이 다 나와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