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정원장 인선권자는 해들리 보좌관?

[정치 톺아보기 92] 기이한 국정원장 인선 과정

등록 2005.06.16 21:22수정 2005.06.17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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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한 고영구 국가정보원장의 후임자 인선 작업이 꼭 보름만인 오늘(16일) 오후 매듭지어졌다. 그것도 '건강'을 이유로 고사한 김승규 법무장관을 국정원장에 내정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꼴이다. 그러니 참여정부 '인재풀'의 한계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인사라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청와대의 설명대로 김 장관이 국정원장에 그렇게 적임자라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앉혔어야 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국정원장 인선작업

a 지난 6월 11일 노무현 대통령이 워싱턴 영빈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마친 뒤 해들리 안보보좌관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지난 6월 11일 노무현 대통령이 워싱턴 영빈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마친 뒤 해들리 안보보좌관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 청와대

이번 국정원장 인선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1일 고영구 원장의 사의표명 보도가 나오자 이날 오후 정례 브리핑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사의 수용' 방침을 밝혔다. 김 대변인은 나중에 다시 기자들에게 익명을 전제로 "고 원장의 후임으로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이 '단수 후보로 유력'하다"고 귀띔했다. 사실상 언론에 '유력'으로 써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러자 일부 언론에서는 이날부터 '유력'에서 '내정'으로 앞서 보도하더니 다음날 일부 언론에서는 인물 소개 기사까지 내보내 권 보좌관의 국정원장 기용을 기정사실화했다.

이처럼 권 보좌관이 '복수 후보' 중의 한 사람도 아니고 '단수 후보'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갑자기 청와대발로 쏟아지자, 열린우리당의 핵심 의원은 청와대 일부 수석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 국정원장 인선에 '신중'을 기해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쪽에서 "인선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요청한 배경에는 유력한 후임자로 알려진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 2년 동안의 '의도적인 힘 빼기와 탈색'으로 정보활동 능력이 현저히 위축된 국정원을 추스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특히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는 북핵 위기 해결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핵심 과제로 닥쳤는데도 노 대통령이 고영구 원장에 이어 참여정부 2대 국정원장에도 '관리형 인사'를 기용하는 것은 사실상 국정원을 '방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위기의식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공격적 대북 정보활동'을 통해 국정원을 북핵위기 돌파 수단으로 적극 활용해야 하는 데 그렇게 하려면 '관리형 인사'보다는 적극적 정보활동을 독려할 수 있는 중량감 있는 인사를 국정원장으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적극 개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진호 국정원장 카드'에 '이상기류' 감지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와 같은 당쪽의 의견 개진을 보고받고서도 '권진호 카드'를 바꿀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상기류'는 감지되었다.

일요일인 지난 5일 김 대변인은 "당초 단수 후보로 추천할 계획이었으나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선택의 폭을 넓게 해 주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따라 3배수로 추천하기로 했다"며 "권진호 보좌관에 대해 당에서 이의를 제기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유력한 후보'였던 권 보좌관의 내정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청문회를 앞두고 이것저것 봐야할 것이 많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자 국정원장 인선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당측의 요청이 받아들여지거나 새로운 '검증사유'가 발생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었다.

이처럼 청와대가 2일 인사추천회의 결과(단수 후보 추천)를 뒤집고 3배수 후보 추천으로 방침을 바꾼 것은 김우식 비서실장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한솥밥을 먹은 가까운 인사일수록 더 엄격하게 검증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지침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후보에 대한 검증이 시작되기도 전에 '유력한 단수 후보'로 추천한 것에 대해 청와대 내부의 비판이 있었고, 지금까지의 관행과도 다른 것인데다 인사권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판단해 후보를 늘리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력한 단수 후보 추천(발표)은 참모들의 실책이었다"고 덧붙였다. 대통령의 '의중'을 참모들이 잘못 읽었다고 시인한 것이다.

'단수 유력' → '3배수' → '3+α'(알파)로 후보가 확장되는 기현상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청와대는 여전히 "권 보좌관이 여전히 유력한 후보로 검토되고 있는 것은 맞다"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물론 기자들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이때부터 권 보좌관이 국정원장이 되는 데는 '2%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에 따라 언론에서는 권진호 카드가 '물 건너 간' 것으로 보고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윤영관 전 외교부장관, 이석태 전 공직기강비서관 등이 후보자군에 오르내렸다.

청와대는 당초에 후보 사전검증 절차를 거쳐 가급적 노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 출국(9일 오후) 전에 국정원장 내정자를 발표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후보군이 확대됨에 따라 출국 전 후임 내정은 물리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청와대는 9일(목) 인사추천회의에서도 후보자를 압축하지 못했다. 김완기 청와대 인사수석은 인사추천회의 뒤에 "국정원장 후보자 인선을 두고 많은 토론을 했으나 3배수 추천(압축)을 못하고 '사람을 더 찾아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밝혔다.

3배수에서 아예 '3+α'(알파)로 바뀐 것이다. 모름지기 인사는 '인재풀'을 기초로 그룹 단위에서 복수 단위 후보를 거쳐 단수 유력 후보로 좁혀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국정원장은 인선은 '단수 유력' → '3배수' → '3+α'(알파)로 갈수록 후보가 확장되는 '기현상'을 보인 것이다.

김완기 수석은 16일 김승규 장관의 국정원장 내정 사실을 발표하면서 "그동안 인사추천회의에서 대통령에게 7∼8명의 국정원장 후보를 추천했다"고 밝혔다.

해들리 안보보좌관이 우리나라 국정원장을 임명한 셈

그러면서도 김 수석은 "권진호 보좌관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검토한 적이 있지만 한미 정상회담 전에 사전조율차 미국에 가서 아주 훌륭하게 그 역할을 수행하고 돌아왔고 한미 정상회담 이후에 미국 쪽에서도 굉장히 좋은 파트너로 인정을 해서 구체적인 언급을 할 정도의 후일담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김 수석이 언급한 '후일담'은 15∼16일부터 흘러나온 노 대통령과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접견시 대화를 가리킨다. 즉 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직후 해들리 안보보좌관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권 보좌관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지 모르겠다"고 언급하자, 이에 해들리 보좌관이 "권 보좌관과 너무 호흡이 잘 맞는다"며 아쉬움을 표명했다는 것.

요컨대 노 대통령이 해들리 접견 이후에 현재의 한미동맹 및 대미관계를 고려해 '권진호-해들리 라인'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청와대·내각 외교안보팀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해들리가 우리나라 국정원장을 인선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과연 김승규 법무장관이 국정원장으로서 '적임자'냐는 것이다.

우선, 내성적인 선비 스타일인 초대 고영구 국정원장와 마찬가지로 섬세한 성격의 김 장관 또한 국정원장 맡는 것을 '주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고 원장이 신병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한 마당에 건강상의 이유로 고사하는 김 장관을 국정원장에 앉힌 것은 앞뒤가 안맞는다.

그리고 공직 수행에서 건강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한 기준이다. 김 장관은 본인이 밝혔듯이 위암으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어 지금도 건강에 매우 유의해야 하는 처지다.

김 수석도 16일 브리핑에서 "김 장관이 어제(15일) 오전까지 주저주저했다"면서 "그것은 딱 한가지 이유다, 건강상의 문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 수석은 "김 장관이 투철한 책임의식에서 '나보다 더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안했으면 좋겠다'는 판단으로 주저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건강만 유의하면 국정원장 직무 수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판단인 듯하다.

국정원은 지난 7년 반 동안 충분히 '힘'이 빠졌고 '색'도 변했다

그러나 어쩌면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식의 인선의 본질적인 문제는 국정원에 대해 '더 힘을 빼고, 더 탈색시켜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국정원관(觀)이다.

그렇다보니 노 대통령은 여전히 '실무 관리형' 인사에게 국정원을 맡겨 정보기관의 탈색과 '제자리 찾기'를 통해 국정원이 정상으로 정립된 이후에 차기 정부에 '인계'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완기 수석이 김승규 국정원장 내정자에 대해 "검찰과 법무부의 주요직위를 두루 역임하면서 발휘한 안정적 조직관리 능력과 청렴 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탈정치·탈권력'의 국정원 혁신을 원활하게 이끌어갈 적임자로 평가했다"고 기용 배경을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국정원은 이미 김대중 정부 5년 동안의 국정원 개혁으로 충분히 '힘'이 빠졌고 '색'도 변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진 지난 2년반 동안의 '힘 빼기와 탈색'으로 정보활동 능력이 현저히 위축되어 이제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까지 인식되고 있다. 그렇게 놀릴 바에야 뭐하러 이렇게 많은 인력을 두면서 국가 정보기관을 유지하는냐는 '해체론'까지 나온다.

알다시피 노무현 정부는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북핵 위기와 함께 출범했다. 자존심 강한 노 대통령이 부시 미국 대통령을 두 번이나 찾아가 이라크 파병을 약속한 것도 북핵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 최고의 국가 정보기관인 국정원은 북핵 위기가 처음 조성된 94년 이후 10년 넘게 북한에 핵무기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몇 개가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마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노 대통령과 차기 국정원장이 할 일은 더 이상 국정원의 힘을 빼고 탈색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더 많은 인력과 자금'을 투입하는 '공격적 대북 정보활동'을 통해 국정원을 북핵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최정예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과 차기 국정원장이 남은 2년 반 동안 '더 힘을 빼고, 탈색시켜야 한다'면, 정작 다음 정부에 인계할 때는 이름만 정보기관일 뿐 더는 정보기관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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