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순례자들의 무덤을 만나다

[산티아고 일기 2] 첫 번째 마을 '부르게떼' 도착

등록 2005.06.29 18:32수정 2005.07.12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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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걷히고 파란 하늘이 나온 피레네 산군을 보며 즐거워하는 까를로스
안개가 걷히고 파란 하늘이 나온 피레네 산군을 보며 즐거워하는 까를로스김남희

2005년 6월 20일 월요일 맑음
오늘 걸은 길 : 생쟁피데포르(St.Jean Pied de Port)-론세발레스(Roncevalles) 27km
오늘 쓴 돈 : 점심 샌드위치 3.6유로 +오렌지 주스 2유로 + 숙박비 5유로 +
저녁 식사 8유로 +성당 헌금 2유로 =20.6 유로

6시, 누군가의 알람이 울린다. 더 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일어나 씻고 식당으로 간다. 바게트에 버터와 잼 발라서 찬 우유로 아침 식사.


증명서에 도장 받고,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 사서 출발한다. 시간을 보니 7시.

조금씩 빗방울이 듣고 있다. 전신주 혹은 아스팔트 바닥에 흰색과 빨강색으로 그려진 표지를 따라간다. 계속되는 언덕길.

벌써부터 숨은 차오르고, 배낭은 어깨를 짓누른다. 이 길이 산티아고 전 구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는데 안개로 인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혼자 혹은 둘이 걷는 사람들이 계속 나를 스쳐간다. 레이첼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산티아고 걷기의 유일한 단점은 이 길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여름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숙소를 잡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 거라고 했다. 숙소 때문에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난 그냥 내 속도대로 가기로 한다.




길가에서 풀을 뜯던 소떼들과 눈이 마주쳤다.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 본다. “안녕? 혹시 너희 조상들이 2000년 전에 이 길을 걸어간 야곱이라는 사람을 봤을 수도 있겠네! 그런 얘기 들어봤니?” 소들은 그저 눈만 껌벅거릴 뿐이다.

나란히 같이 걷게 된 남자는 바르셀로나에서 온 카를로스. 그 역시 3년 전에 이 길의 절반을 걷고 난 후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았단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에 걸쳐 완주할 계획이란다.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피레네 산군을 바라보며 휴식 중인 순례자들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피레네 산군을 바라보며 휴식 중인 순례자들김남희
순례자들이 걸어놓고 간 손수건들
순례자들이 걸어놓고 간 손수건들김남희
9시 10분. 빗줄기가 거세진다. 두 시간 만에 오리슨 알베르게에 도착.
오렌지 주스로 비타민 보강하며 잠시 휴식.

10분 쉬고 다시 출발.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10시 반. 갑자기 안개가 사라지고 햇살이 나왔다. 10미터 앞도 보이지 않던 상황은 끝나고 피레네 산국과 푸른 초원, 풀을 뜯는 양떼들이 장면 전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타났다. 까를로스, 독일에서 온 요요와 초원 위에서 산을 바라보며 간식을 먹었다.

이제 비와의 싸움은 끝나고, 태양과의 싸움이다. 계속되는 언덕길. 아침에 먹은 우유 때문인지 계속 설사가 나와 곤혹스럽다. 바위 뒤나 나무 뒤로 가 볼일을 봐야하니.

12시 20분.
샘물에 도착. 산티아고로 가는 길의 곳곳에는 이렇게 순례자들을 위한 수도가 있다.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이고 물병도 다시 채웠다.

점심으로 싸온 샌드위치를 이곳에서 먹었다. 바게트가 얼마나 딱딱한지 턱이 아파 씹기가 힘들 정도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이 오늘의 목적지인 론세발레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이 오늘의 목적지인 론세발레스김남희

론세발레스 수도원의 종탑
론세발레스 수도원의 종탑김남희
잠시 후 스페인 땅으로 들어섰다. 까를로스가 나를 보고 웃으며 “스페인에 온 걸 환영해!"라고 외친다. “환영해줘서 고마워”라고 답하자 “뭔가 달라진 걸 못 느끼겠니?”라며 모국에 대한 긍지를 드러낸다. 나도 기꺼이 분위기를 맞춰준다.

“그럼, 느끼고말고. 잔디색깔도 프랑스보다 더 푸르고, 공기도 더 맑고, 나무도 더 예쁘네.”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1시 20분.
피레네 산맥을 가로지르는 이 길의 가장 높은 지점인 ‘콜 데 레포델(Col de Lepoeder 1410m)’에 도착. 여기서 다음 목적지인 론세발레스까지는 3.6킬로미터가 남았다. 길은 이제 내리막이다. 아스팔트길을 버리고 숲속으로 난 길을 걸어 한 시간 만에 마을에 도착.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4시에나 문을 연다고 한다. 이미 입구에는 배낭들이 열을 맞춰 세워져 있다. 나도 가방을 세워놓고 기다린다.

지금 이 길을 걷는 동양인은 나 혼자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안 한 프랑스인 아줌마가 자신의 딸이 한국인이라며 이름을 알려준다. 이씨 성을 가진 그녀는 어렸을 때 프랑스로 입양되었다고 한다. 아,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작년에 그녀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부디 그녀가 한국에서 좋은 경험을 더 많이 했기를 빌어본다.

4시에 알베르게가 문을 열었다. 침대가 모자랄까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 이곳의 침대 수는 자그마치 105개. 마치 군대 막사 같다. 동독 출신인 요요는 1970년대 동독의 학교 기숙사 같단다.

배정받은 침대에 짐 풀고, 순례자들을 위해 특별한 가격에 준비되는 저녁 식사 예약하고, 샤워하고, 빨래해서 뒷마당에 널었다. 그리고 동네를 둘러보고 나니 벌써 6시다. 이제 식사시간까지는 꼭 한 시간 남았다. 벌써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성당으로 갔다. 이곳 성당에서는 매일 저녁 8시면 순례자들을 위한 축복 미사를 거행한다. 종교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이곳 미사에 참석해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축복을 받는다.

순례자들이 빨아 널은 빨래가 햇살과 바람에 보송보송 말라가고 있다.
순례자들이 빨아 널은 빨래가 햇살과 바람에 보송보송 말라가고 있다.김남희
론세발레스 성당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축복미사를 진행중이다.
론세발레스 성당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축복미사를 진행중이다.김남희
나도 카를로스와 함께 미사에 참석했다. 신부님은 오늘 이곳에 도착한 모든 이들의 국적을 일일이 언급하며 이 길을 걷는 내내 아무 어려움 없이 성령의 은총으로 순례를 마칠 수 있기를 축원해 주신다.

인간이 신의 이름으로 다른 이를 축복한다는 것.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관습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성당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다.

2005년 6월 21일 화요일 오늘도 맑음
오늘 걸은 길 : 론세발레스(Roncesvalles) - Zubiri(주비리) 22km
오늘 쓴 돈 : 아침식사 2.5유로 +점심 식사(바게트와 복숭아 두 알) 1.82 유로 +
저녁식사 10 유로 +숙박비 10유로 = 24.32 유로

오전 6시.
이 거대한 막사에 불이 켜졌다. 눈을 떠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짐을 꾸려 출발한 후다. 어젯밤, 100명이 자는 방이기에 귀마개를 하고 잤다. 덕분에 세상 모르고 푹 잤다.

카를로스는 침대 운이 나빴다면서, 옆자리 사람이 엄청나게 코를 고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고 한다. 서둘러 씻고, 짐을 꾸려 숙소를 나서니 여섯 시 반. 오늘도 까를로스와 함께 걷는다.

날은 푸르게 개어 있다. “오늘 푹푹 찔 날씨야”라며 카를로스가 한숨을 쉰다.
“태양의 나라 스페인에 왔다는 걸 확인하는 거지 뭐.”
태연한 척 하지만 뒤통수에 와 닿는 햇살의 강도가 예사롭지 않다.

어제 생긴 왼쪽 네 번째 발가락 물집이 나를 공격하고 있다. 카를로스가 준 특수반창고(‘제 2의 피부’라고 불린단다)를 붙였는데도 여전히 고통스럽다.

론세발레스 수도원과 마을 전경. 맨 왼쪽 건물이 순례자들의 숙소로 이용되는 알베르게.
론세발레스 수도원과 마을 전경. 맨 왼쪽 건물이 순례자들의 숙소로 이용되는 알베르게.김남희
7시 첫 번째 마을인 부르게떼(Burguete)에 도착.

아침 일찍 문을 연 카페에서 크로와상과 도넛과 사과로 아침 식사. 이 마을은 헤밍웨이가 머물면서 낚시를 즐기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쓴 곳으로 유명하다. 혼자 은둔하며 송어낚시를 즐기던 이곳을 천국으로 묘사하는 편지를 피츠제럴드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제 헤밍웨이가 남긴 흔적은 사라지고, 거리 곳곳에는 산티아고 길을 알리는 노란 조개껍질 문양만 가득하다.

오늘 걷는 길은 내내 숲길이다. 숲을 빠져나오면 작은 마을이 나오고, 마을 끝에서 다시 산티아고 순례 길은 숲으로 이어진다. 초여름 숲의 나무들은 이미 녹음이 짙어지고 있다.

어제는 산티아고 길을 걷다가 죽은 브라질인의 무덤을 봤는데, 오늘은 일본사람의 무덤을 만났다. 잠시 멈춰 서서 죽은 이의 명복을 빌었다.

두 번째 마을에서 까를로스와 헤어지고 혼자 걷는 숲길. 숲은 고즈넉하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만 아니라면 이 길을 걷는 기쁨이 두 배가 될 텐데.

12시.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주비리(Zubiri)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새로 문을 연 알베르게로 들어서니 모든 게 너무나 깨끗하다. 무엇보다 규모가 작다는 게 마음에 든다. 게다가 인터넷이 무료란다. 환호성을 지르며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며 웃는 주인.
첨부파일 산티아고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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