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아그네스, 지친 순례자를 보듬다

[산티아고 일기 3] 절룩거리며 들어선 팜플로냐

등록 2005.07.06 14:27수정 2005.07.12 20:45
0
원고료로 응원
끝없이 펼쳐진 밀밭 사이를 한 점 점이 되어 걸어가는 순례자. 페르돈 고개 가는 길.
끝없이 펼쳐진 밀밭 사이를 한 점 점이 되어 걸어가는 순례자. 페르돈 고개 가는 길.김남희
Twenty years from now
you will be more disappointed
by the things that you didn't do
than by the ones you did do.
So throw off the bowlines.
sail away from the safe harbor.
Catch the trade winds in your sails.
Explore. Dream. Discover.

20년이 흐른 후
당신이 이룬 일들보다는
하지 못한 일들로 인해 더 깊이 좌절하리라.
그러니 밧줄을 던져라.
안전한 항구로부터 배를 출항시켜라.
돛에 무역풍을 달아라.
탐험하라.
꿈꾸라.
발견하라.


-마크 트웨인



2005년 6월 22일 수요일 맑음

오늘 걸은 길 : 주비리(Zubiri)-팜플로냐(Pamplona) 21km
오늘 쓴 돈 : 아침 4유로 + 점심 17유로 + 숙박 5유로 = 26유로


산티아고 길을 걷는 동안 늦잠을 잔다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알베르게는 체크아웃 시간이 오전 8시인 데다가, 새벽 5시면 사람들이 일어나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시작되므로 잠은 달아나고 만다.

오늘도 5시경에 눈을 떴지만 침대에 더 누워 게으름을 피우다가 한참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배낭을 꾸려서 나오니 이미 준비를 끝낸 까를로스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날은 오늘도 화창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6시 반이다. 화학공장 지대를 지나 숲길을 걸어 한 시간 반 만에 라라소냐(Larrasona)라는 예쁜 이름의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의 유일한 바에서 아침을 먹는다. 스페인의 시골 마을에는 이렇게 작은 식당 하나, 슈퍼 하나 정도가 겨우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 정도도 없는 마을이 수두룩한데 그런 마을에는 '보부상 트럭'이 다닌다고 한다. 트럭 기사가 주문을 받아 빵과 생필품을 배달해준다고 한다.

크로아상과 오렌지 주스로 배를 채우고 나와 다시 걷는다. 오른쪽 무릎이 다시 아파온다. 곤혹스러워 하는 나를 보며 까를로스는 이 모든 게 내 죄 때문이라고 놀리며 묻는다.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무릎이 그렇게 아픈 거야?"
"그러는 너는? 넌 멀쩡해?"
"난 지금 죽어가는 거 안 보여?"



순례길 발목 잡는 무릎 통증

팜플로냐 마을 어느 집 벽 장식.
팜플로냐 마을 어느 집 벽 장식.김남희
걷기 시작한 지 네 시간 만에 작은 마을에서 섰다.

무릎 통증이 너무 심해져 한 발을 떼는 것도 힘들어졌다. 덜컥 겁이 난다. 작년에 네팔에서 무거운 배낭 메고 트레킹하면서 오른쪽 무릎이 조금씩 아프곤 했는데, 이렇게 심각하게 아파보긴 처음이다. 여기서 중단하고 파리로 돌아가게 되는 건 아닌지 괜히 걱정이 되고, 속이 상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소냐와 마리안느의 도움으로 알약을 얻어 복용했다. 약이라면 질색을 하는 내가 마다않고 알약을 삼키는 걸 보니 아프긴 많이 아픈가보다. 까를로스는 나 때문에 계속 멈추거나 쉬면서 느린 행군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오늘 팜플로냐까지 가기는 틀린 것 같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출발한 사람들 중에 꼴찌다.

"우리 오늘 꼴찌야."
"그게 마음에 걸려?"
"아니."
"나도 아니야. 그럼 됐네. 계속 천천히 걷자."

고마운 까를로스.

2시. 아따라비아(Atarrabia) 마을.

이곳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까를로스는 '순례자용 음식(산티아고로 가는 길에는 순례자들을 위해 저렴한 가격의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이 많다)'을 내놓는 식당들이 점점 상업화되어가고 맛도 없어진다면서 더 이상 그런 식당에 가기 싫다고 한다.

우리가 마을에서 찾아낸 이 식당은 메뉴도 없고, 그날 그날 주방장이 두세 가지 요리를 준비하는 전형적인 마을 식당이다.

샐러드와 생선찜, 아이스크림으로 이어지는 세트 메뉴는 양도 푸짐하고 맛있었다. 게다가 와인 한 병까지 같이 나온 두 사람의 식사비가 우리 돈 2만원. 아침에 과일도 까를로스가 사고, 인터넷 비용도 그가 냈고, 오늘 하루 종일 나 때문에 고생하는 처지라 점심은 내가 샀다.

2시를 넘긴 오후의 해는 살인적인 열기를 내뿜고 있다. 왜 이 시간에 가게와 식당들이 문을 닫고 '시에스타(낮잠)'를 하는지 이해가 간다. 더위에 지친 까를로스와 나도 강가로 가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고, 발을 물에 담그고 쉬었다. 서늘한 물의 기운이 땀과 열에 젖은 내 발에 감겨온다.

4시가 넘은 시간에야 절룩거리며 팜플로냐에 들어섰다.

매년 7월 초에 열리는 소와의 달리기 경주로 유명한 마을. 이곳의 알베르게는 거대했다.

짐 풀고, 씻자마자 침대에 누워 두 시간쯤 쉬었다.

햇살이 한풀 꺾인 7시가 넘어서 까를로스와 광장으로 나갔다. 팜플로냐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하다는 카페 이루나. 노천카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오징어 튀김과 또르티야로 저녁을 먹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끝났다.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며 행진하는 사이 마을 관청에서는 아이들에게 모자와 사탕등을 던져준다. 오바노스.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며 행진하는 사이 마을 관청에서는 아이들에게 모자와 사탕등을 던져준다. 오바노스.김남희
2005년 6월 23일 목요일 맑은 후 저녁에 세찬 소나기

오늘 걸은 길 : 팜플로냐(Pamplona)-오바노스(Obanos) 21km
오늘 쓴 돈 : 점심 8.5유로 + 숙박 5유로 + 저녁 4.5유로 = 18유로


오늘도 꼴찌에 가까운 출발이다.

걷기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오른쪽 다리의 마비증세가 다시 시작됐다. 일행과 점점 격차가 벌어지며 뒤로 처지는 나.

힘들게 5km를 걷고 나니 시주르 메노르(Cizur Menor)마을.

그만 가고 머물려고 하다가 갈 수 있는 데까지 더 가보자고 고집을 부렸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새로 잡힌 물집과 온 몸에 돋아 오른 붉은 반점(모기인지 벼룩인지 알 수가 없다. 이걸 본 카를로스 왈 "스페인에는 벼룩이 없어. 이것도 네 죄 때문이야"라고 놀린다), 짓눌린 어깨의 통증….

온 몸이 최악의 상태이다.

푼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 도착하면 꼭 짐을 부치겠다고 다짐해본다. 나를 걷게 해 주고, 이 세상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다리에게 그동안 너무 무심했었나 보다. 그간의 무신경을 다리에게 사과하고, 다시 걷는다.

시주르를 지나니 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는 아름다운 길.

혼자서 고독을 즐기며 서두르지 않고 걷는 이 기분도 좋은데!

길가 의자에 앉아 밀밭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을 느껴본다. 몸은 너무나 고단해도 마음은 서늘한 기쁨이다.

11시. 너무나 복잡하고 긴 이름의 자리퀘이궤 마을 도착.

광장 수도에서 목을 축이고, 물통도 채워 넣고 잠시 휴식.

아침도 못 먹은 터라 너무나 배가 고픈데 이 작은 마을에는 식당도 없다. 옆에서 식사를 하던 노부부(일흔은 되어 보이는 연세인데 자전거로 산티아고 순례 중인 스페인 부부)가 비스킷과 체리를 건네준다. 사양도 안 하고 바로 받아먹었다.

벤치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니 흰 구름이 두둥실. 경계도 없이 막힘도 없이 자유롭게 흘러가는 구름을 보니 문득 내 신세가 처량하다. 나에겐 왜 날개가 없는 걸까? 배도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은데….

몇 번의 날갯짓만으로 옆 마을의 식당도 찾아가고, 화장실 위로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삶이 편안할까?

별 시시한 생각을 다 해보다가 몸을 일으킨다. 한 번 더 목 축이고 다시 출발.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페르돈 고개 정상에 서면 순례자들의 행렬을 형상화한 조각과 만난다.
페르돈 고개 정상에 서면 순례자들의 행렬을 형상화한 조각과 만난다.김남희
12시. 마침내 페르돈(Perdon) 고개 정상에 서다.

풍력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 곳에 서니 뒤로는 걸어온 길이, 앞으로는 가야 할 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제 길은 내리막이다. 내리막과 오르막에서는 무릎이 더 거세게 비명을 질러댄다. 오른발을 질질 끌며 걸은 지 한 시간 반 만에 우테르가(Uterga) 마을 도착.

식당으로 들어가 주문을 기다리는데 아무도 안 온다. 종업원들은 식당에 가득 찬 단체 손님을 응대하기에 바빠 내게는 기다리라는 시늉만 한다. 스페인어 한 마디 못하는 나는 그저 기다릴 뿐. 결국 20분 만에 포기하고 나온다.

갑자기 서러워진다. 밥도 못 먹고 걸어야 하다니.

무릎을 치료해준 독일인 아줌마

태양은 머리 위에서 불을 내뿜는데 이젠 물도 떨어졌다. 철조망 너머로 마당에서 쉬고 이는 부부가 보여 물동냥을 했다.

"아구아, 뽀르 빠보르(물 좀 주세요)."

주스가 더 시원하다며 파인애플 주스를 가져온 주부. 두 잔이나 '원 샷' 하고, 올케가 보내준 매듭 핸드폰 줄을 선물로 드렸다.

30분을 더 걸으니 다음 마을 무르자발(Muruzabal).

다시 식당으로 간다.

이번엔 바로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지만 이제는 스페인어 때문에 문제다. 겨우 겨우 샐러드와 생선요리와 후식으로 과일을 주문하는 데 성공. 그동안 까를로스 덕분에 밥 한번 편하게 먹고 다녔음을 실감한다.

푼테라레이나를 3km 남기고, 오바나스(Obanas) 마을에 짐을 풀었다. 지친 다리도 문제지만 작고 조용한 마을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알베르게에서 일하는 아저씨는 내가 이곳에 머무는 첫 한국인이라며 기뻐하신다.

독일에서 온 마리아, 아그네스, 이사벨라 아줌마. 처음 만난 여행자인 내 발을 정성껏 치료해줘 감동시켰다.
독일에서 온 마리아, 아그네스, 이사벨라 아줌마. 처음 만난 여행자인 내 발을 정성껏 치료해줘 감동시켰다.김남희
이곳에서 만난 독일인 아그네스 아줌마.

내 침대 곁을 지나다가 내 발을 보더니 구급약품통을 들고 온다. 물집으로 곪은 내 발을 얼마나 정성스레 치료해주시는지! 무릎에도 약을 바른 후 붕대를 감아주시고, 벌레 물린 등과 팔에도 약을 발라주시고, 근육통 알약까지 물에 녹여 주셨다. 그것도 모자라 여러 가지 약품과 밴드를 챙겨주고, 약국에 가서 살 약품 목록까지 적어준다.

천사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너를 도울 수 있어서 정말 기뻐!"라고 말하는 아그네스 아줌마. 아줌마의 환한 미소가 육체적 고통을 다 잊게 한다.

슈퍼에서 빵과 치즈, 토마토를 사와서 샌드위치 만들어 먹고, 동네를 돌았다. 마침 내일이 여름의 시작인 날이자 성 요한의 명명일이라며 축제가 열리고 있다.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붉은 벨트를 맨 청소년들 곁에 서서 축제를 구경하자니 오랜만에 여행자로 돌아간 기분이다.

밤이 이제야 서서히 마을의 광장 위로 내려앉고 있다.
첨부파일 산티아고일기3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4. 4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5. 5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