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그 고토의 현장을 찾아

중국 고구려 역사유적 기행 ① - 청조의 고도, 심양

등록 2005.07.04 10:41수정 2005.07.0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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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해 6월 중순부터 일주일간의 일정으로 옛 고구려 역사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는 환인과 집안 등지를 비롯해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조선족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길 지역을 방문하였다.

중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동복공정'이 한참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마침 고구려의 옛 역사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시점에 방문한 중국 고구려 역사유적지 탐방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불과 1년 전 현재라는 시간에 한-중 사이 가장 뜨거운 '역사의 소용돌이'속으로 빠져들었던 '동북공정'에 대한 논란은 지금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르게 잊혀져가고 있다. 새로운 시간의 덮개가 그 위를 가로 누르고 있을 뿐이다. 당시 '동북공정'에 대한 논란이 극에 달한 시기에 그 역사의 현장을 방문한다는 것은 매우 가슴 설레는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1년이 지난 지금 그 역사의 현장과 오늘을 생각하며 다시 글을 정리한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수도 있지만 앞으로 중국과 한국 북한과의 사이에서 현대사의 가장 큰 중핵(?)으로 떠오를 옛 고구려의 고토 강역을 답사했던 것을 다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같은 취지에서 앞으로 10여 회에 걸쳐 오늘의 중국의 모습과 고구려 역사 유적지, 당시 만났던 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이 글을 통해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민족의 시원이 시작된 동북여행의 첫 관문, 심양

a 심양 고궁의 웅장한 건물

심양 고궁의 웅장한 건물 ⓒ 정윤섭

오늘의 중국과 분단된 한반도, 그리고 옛 고구려의 고토(古土)에 살고 있는 조선족 교포들, 고구려가 이곳의 강토를 차지한 지 천년의 시간이 훨씬 넘은 현재적 시각은 모두를 서로 다른 삶의 모습 속에 처하게 하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왕조국가가 무너지고 현재라는 시간은 중국과 한국을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라는 두 이념체계로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옛 고구려의 후신과도 같은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 속에 남한과 대립하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지방정부로 예속시키기 위해 추진하고 있다는 '동북공정', 역사를 해석하고 보는 시각이 자국에 유리하게 볼 수는 있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고구려는 옛 백제, 신라와 더불어 삼국의 한 나라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단군조선이라는 민족의 시원이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간적 뿌리의 원류이자 한민족의 정체성을 얘기하게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생각된다.


오늘날의 한국과 중국 그리고 남과 북,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 속에서 중국 여행은 시작되었다.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중국이 이렇게 가까운가에 새삼 놀란다. 중국의 북경과 상해, 심양과 같은 한-중 중요 노선의 비행기 탑승 시간은 대부분 2시간을 넘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고 약간의 잡담과 기내식을 마치고 나면 비행기는 이내 공항에 다 도착했음을 알린다.

중국과의 이 가까운 시간적 거리에 비해 그렇게도 멀게 느껴졌던 공간적 거리는 아마 수교되기 이전의 중국과의 관계 때문으로 생각된다. 죽의 장막에 갇혀 있던 중국, 남북의 분단된 상황,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적 대립 속에서 수천 년을 이어온 중국대륙은 미지의 세계 속에 갇혀 있었다. 중국은 거의 50여년을 폐쇄적인 공간 속에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념적 공간 속에 그리도 멀게 느껴졌던 중국이 이제 비행기를 타면 2시간 이내의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변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때론 수주일이 걸려서 황해를 건너고 때론 몇 달이 걸려 내륙을 통해 중국을 오갔던 오래 전 고대 왕조시대를 생각해 보면 지금 새로운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며 중국의 심양 영해로 들어가면서 파란 구름 속에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이것은 영토라는 거리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출발할 때 장마의 여운으로 잔뜩 흐린 인천 공항에서 벌써 멀리 날아온 것이다. 인천을 출발해서 심양에 내리기까지 비행기 속에 앉아 있는 시간은 약 1시간 40분 가량이었다.

청태조 누르하치의 고향이자 청나라 초창기 수도

a 현대적인 시설로 지어진 심양공항

현대적인 시설로 지어진 심양공항 ⓒ 정윤섭

심양공항은 한국의 인천과 부산, 대구 등 한국과 오가는 노선이 많은 국제공항이다. 국제공항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건물도 새로 짓고 새롭게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심양은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까워서인지 최근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 한국과의 항공노선이 가장 많다고 한다.

심양 공항에 내려 문을 나서는 순간, 여름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느껴져 왔다. 비행기에서 내려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 가이드가 안내를 위해 마중을 나온 것이다. 이번 고구려 역사유적 답사의 가이드, 그는 손에 우리 일행을 찾는 글귀를 써서 들고 있었다. 중국여행의 대부분의 가이드가 조선족교포인 것처럼 그 또한 조선족 남자였다.

그는 그리 세련되지 않은 모자를 꺼벙하게 쓰고 우리를 맞았는데 조금 어리숙하게 생긴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조선족 교포였다. 가이드의 이름은 임문성(林文星)이었다. 요령성 중국여행사에 근무하고 있는 그는 집이 심양이고 북한에는 가까운 친척이 살고 있다는 북한출신이었다. 그는 주로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가이드를 하고 있었지만 일본어도 할 줄 알아 일본인 가이드도 하고 있었다.

이곳은 대부분 교포 2,3세들이 주역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북한과 가까운 이곳의 지리적 여건 때문에 여러 가지 문화적으로 북한식에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이드는 경력이 꽤 있어 보였다. 여행 내내 그는 그렇게 큰 감정의 변화 없이, 중국인의 그 만만디 기질처럼 느껴지게 덤덤한 표정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동안 변방의 한 도시로 생각하고 있던 심양은 한층 놀라움을 갖게 한다. 외형적으로만 볼 때 심양은 중국의 5번째 도시고 인구만 해도 800만이 되는 큰 도시다. 중국은 보통 도시의 개념이 도시지역과 농촌지역이 합해진 형태라고 하며, 심양의 경우 도시지역을 제외한 농촌지역의 인구가 약 200만 가량 된다고 한다.

a 잘 정비된 심양의 도로

잘 정비된 심양의 도로 ⓒ 정윤섭

심양은 중국의 동북지역 삼성(三省)의 하나인 요령성의 성도(省都)로 옛 이름은 봉천(奉天)이었으며 동북지방 최대의 도시로 이 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다. 또한 중국의 동북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역사적으로 청나라를 세운 청태종 누루하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초창기에 청의 수도이기도 하였던 역사도시로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가 초창기에 살았던 고궁이 시내에 있다.

심양은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개발되어 한대(漢代)에는 요동군(遼東郡)에 속했으나 뒤에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고 다시 당(唐)의 지배 하에 들어가서 심주(瀋州)가 되었다. 그 후 발해에 속하기도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의 무대가 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심양은 19세기 말에 러시아와 일본의 동북침략이 시작되자 이들의 침략의 목표가 되고 러일전쟁(1904∼1905)때 공격의 목표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심양에는 도시의 서부에 일본인에 의해 개발된 상가, 주택가 지구가 남아 있어 당시를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심양은 오래 전부터 고구려를 비롯해 중국의 왕조를 개국한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 등 여러 나라들이 흥기(興起)한 곳이자 일제침략의 무대가 되는 등 오래도록 역사의 파란만장한 현장의 중심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양은 도시의 어디를 가나 한국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코리아타운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는 심양에서도 화려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이 화려한 코리아타운의 밤거리를 걷다 보면 몇 걸음이 멀다하고 거지들이 따라 붙는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은 통이 크고 돈을 잘 주기 때문에 거의 한국인들만 보면 거지들이 뒤를 따라 오면서 손을 벌린다고 한다.

거지들이 시내를 배회하는 사회주의 국가 중국 심양에서 한국인에게 유독 손을 벌리는 것을 보면 경제적으로 꽤 성장한 한국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야 할지, 아니면 자본주의 방식을 도입한 중국사회의 모순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야 할지.

돌아오는 길에 이곳 심양에서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냈는데, 코리아타운의 한 야외 생맥주 집에서 생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도중에 기타를 맨 초등학교 4,5학년 나이의 꼬마들이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노래 3곡을 불러주고 100위엔(중국돈)을 받았는데 잘 벌면 웬만한 부모 월급보다 많이 번다는 아이들이었다. 이국땅의 한 골목 야외 생맥주집에서 아이들의 청량한 노래소리를 들으며 생맥주를 마시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곳 심양에서는 한국식 식당도 쉽게 볼 수 있어 한국에서 먹는 식탁의 음식 그대로 한국식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북한에서 직접 경영하는 호텔이나 식당도 있는데 자본주의식 경영이 서툴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심양에는 한국영사관뿐만 아니라 북한영사관도 함께 있다. 얼마 전 이곳 한국 영사관으로 탈북 북한동포들이 들어가 외교적인 문제가 되는 등 남과 북의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심양이라는 공간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갈등과 교류가 소리 없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심양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국, 남과 북, 그리고 조선족 동포 등 서로 다른 국적과 체제 속에서 새로운 문화의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자로도 언어로도 소멸된 심양고궁 현판의 만주어

a 심양 고궁의 대정전 건물

심양 고궁의 대정전 건물 ⓒ 정윤섭

심양의 역사적 현장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 심양 시내에 있는 고궁이다. 심양고궁은 북경의 고궁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잘 보존된 덕분에 중국 왕조시대의 면모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이 고궁은 청나라를 세운 1대 황제인 누르하치와 2대 황제인 태종 황타이가 왕조의 기초를 다지면서 건축한 것으로 천명(16116년 누르하치가 황제에 오르고 나서 부른 연호)10년부터 시작해 승덕원년(1636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a 우리 궁궐의 지붕 부분과 비교된다

우리 궁궐의 지붕 부분과 비교된다 ⓒ 정윤섭

이를 기반으로 고종 건륭제와 인종 가경제 재위시에 확장하여 현재의 모습인 6만㎡의 부지에 70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궁전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이곳 심양고궁에서 3대 황제가 머무른 후에 북경으로 천도하였는데 천도한 후에는 이곳을 '봉천행궁'이라 부르며 황제가 동북지방을 순회할 때 머물렀다고 한다.

심양고궁은 17세기 초에 한족이 아닌 이민족 여진족이 세웠기 때문에 여진족의 토착적이고도 고유한 문화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곳에서는 만주족, 한족, 몽골족의 건축 문화가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오랜 역사동안 이곳을 차지한 주인에 따라 그 문화적 특성이 달라야 했던 동북지역의 요충지인 심양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주인들 속에 옛 고구려의 강역이었던 때의 그 문화의 흔적도 남아있을 것이다.

a 고궁 현판의 만주어, 이제는 사라진 문자다

고궁 현판의 만주어, 이제는 사라진 문자다 ⓒ 정윤섭

그 명멸하는 역사의 혼재 속에 나타난 흔적을 고궁의 현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 고궁의 대정전에 있는 현판을 보면 만주어의 문자가 남아 있는데 지금은 이미 문자로도 그리고 언어로도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중국의 한 왕조(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의 언어조차 흔적 없이 사라져 있는 것을 보면 중국문화의 거대한 용광로(?) 같은 힘과 함께 우리 역사의 그 끈질김이 새삼 가까이 느껴진다.

덧붙이는 글 |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논란이 1년이 지난때에 벌써 잊혀져 가고 있는 당시를 생각하며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조선족 동포들을 생각하며 여행기를 쓴다. 오랜 역사의 부대낌 속에 살아야 했던 인접국 중국과 오늘의 한반도를 생각하면서.

덧붙이는 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논란이 1년이 지난때에 벌써 잊혀져 가고 있는 당시를 생각하며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조선족 동포들을 생각하며 여행기를 쓴다. 오랜 역사의 부대낌 속에 살아야 했던 인접국 중국과 오늘의 한반도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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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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