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3] KMAG의 건의가 담긴 보고서(1951년 2월 3일자).
산성동 피해 상황(1951. 2. 3) | | 인명 피해 | 사망 | 남 8명 | 여 26명 | 합 34명 | 중상 | 남 20명 | 여 22명 | 합 42명 | 경상 | 남 14명 | 여 16명 | 합 30명 | 실종 | 남 14명 | 여 16명 | 합 30명 | 가옥 | 소실 | 62채 | | | 파괴 | 7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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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3]에 따르면, 산성리 폭격으로 민간인 사상자는 136명이나 발생하였던 반면(1항), 적군 피해는 하나도 없었다(2항). [표]로 정리한 민간인 피해 상황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실종자가 30명으로 너무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연이은 네이팜 폭격으로 시신이 지나치게 손상돼 신원 확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실종자의 숫자는 폭격의 강도와 비례한다.
둘째, 여자(80명)가 남자(56명)보다 인명 피해가 훨씬 심하다는 점이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폭격 당시 남자들은 노인과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나무하러 갔고, 여자들은 마을에서 모여 길쌈을 하다 많이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 자료들을 보면 "여자와 아이만 있기 때문에" 폭격을 취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사상자 가운데 여자·아이의 비율은 폭격의 정당성과 반비례하며, 여자 사상자가 많다는 것은 산성리 폭격이 정당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이다.
셋째, 실제 피해는 더 심했겠지만 일단 한국군 2사단의 보고만 보더라도 피해 규모가 컸다는 점이다. 136명에 달하는 사상자, 69채에 달하는 가옥 손실은 마을이 완전히 초토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주민들은 집이 산의 경사면에 바로 붙어 있어서 폭격이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집들이 불탔다고 증언했다.
[문서 3]에 따르면,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은 미 8군에 산성리 폭격사건을 조사할 것을 권유했다(5항). 이로인해 미 8군과 미 5공군의 감찰감이 합동으로 일주일간 조사해, 1951년 2월 13일 양쪽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이것이 산성리 폭격 사건에 대한 '합동조사보고서'이며, [문서 4-1]과 [문서 4-2]는 그 초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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