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다시 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 밖에 없는 것!

<사랑에 관한 다섯개의 소묘>를 보고

등록 2005.07.10 00:58수정 2005.07.1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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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있어요?"

연극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를 보기 전에 기다리는 동안 몇몇 관객들이 와 이런 질문을 했을 때 사실 많이 놀랐다. 물론 나의 무지도 일정부분 작용했겠지만, 영화도 아닌 연극, 게다가 유명 스타들이 나오지도 않고, 인지도가 높은 극장에서 하는 연극도 아닌데, 관람하러 온 관객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해하기는 했지만, 그 말은 곧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가 앉을 자리 없이 좌석을 꽉 채운다는 뜻인데, 정말 그게 가능하기는 한지 마음 속으로 공감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지갑을 들고서 물어보는 것을 보니 초청권으로 온 게 아니라 제 돈 다 내고 보는 듯 싶은데, 영화에 비해 비싼 연극을 정말 그렇게 채운다는 게 가능할까. 아니, 유명 스타나 개그맨들을 내세우지 않고도 그게 가능한 일까라며 관극전에 끊임없이 의문에 시달려야 했다.

"야, 이 연극 되게 재미있다더라."

사랑은 누구에게나 다 다른 색깔로 찾아든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다 다른 색깔로 찾아든다.극단 오늘
연극 시작 전에 뒤에 있던 한 여성 관객이 이런 말을 하기도 해 제법 기대가 되는 연극이었다. 그러나 총 다섯 개로 이루어진 에피소드 가운데 첫 번째 에피소드인 프롤로그가 좀 특이하긴 했지만, 무난한 편이라 대체 무슨 매력이길래 하는 의문은 더욱더 짙어만 갔다. 과연 이 정도 수준으로 관객들 사이에서 재미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간 것일까?

이런 의문은 두 번째 에피소드 <노총각&노처녀>를 보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처음에는 남녀 둘이서 여관 안에 들어온 상황이라 그렇고 그런 므흣한 상상을 하기는 했지만, 잠시 후 이어지는 대화에서 그 둘의 사이가 오래된 친구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의 매력은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포복절도 할 만한 입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래 극본에는 "니가 안중근 의사냐? 콧털 기르게"라고 되어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을 절묘하게 반영해 "니가 에릭이냐? 콧털 기르게"라는 등으로 변해 관객들의 웃음을 이끌어내었다.


시트콤과 개그콘서트의 중간에 있을 만큼 유머러스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흔히들 싸우면서 정드는 남녀간의 사이를 현실감있게 잘 잡아내었다.

이 때부터 관객들의 박수 행진이 시작되었다. 예전에 무려 10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연극에서 10개 에피소드가 다 끝나고서야 박수가 나왔던 것에 비해, <사랑에 관한 다섯개의 소묘>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관객들의 박수가 나오기 시작하여, 마지막 다섯 번째 에피소드에 이르기까지 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관객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야, 정말 이 연극 성공할만하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현실감 있는 극본과 그를 다소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배우들에게 매료되어 세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되기도 전에 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기대와 달리 세 번째 에피소드 <불치병>은 암에 걸린 남편과 긴 시간 병수발을 하며 지친 아내의 우울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였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관객들이 연극에 빠지게 하기 위해 미끼로 던져놓고 결국은 무거운 주제로 빠지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집중하기는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오히려 점점 더 빠져드는 나를 발견했다.

한없이 슬프고 아름답게 그려지는 드라마 속 불치병 주인공들에 비해 슬프거나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실제로 병이 장기화되면서 사랑하는 이들이 겪을 수 있는 갈등과 고통스런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 모습에 저절로 빠져들게 되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 비해 관객 호응도가 적지 않을까 싶었지만,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인지 관객들은 다소 무겁고 음울했던 세 번째 에피소드 <불치병>이 끝난 후에도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무난한 출발에 이어 예상을 뒤엎는 유쾌함, 그리고 그 분위기를 한 번에 가라앉힌 무거움에 이어 이어지는 이야기가 무엇일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연극을 여러 차례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져든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네 번째 에피소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 누워 지저분하게 누워있는 남자 주인공이 보이자 사실 뻔한 스토리가 아닐까 많은 걱정을 했다. 백수 건달인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착하디 착한 여자의 이야기면 어쩔까 싶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괜한 기우에 불과했다.

"앙거, 일단 앙거."

네 번째 에피소드 <바다사나이>는 자칫하면 중년 부부의 지루한 이야기에 될 뻔한 것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엮어가며 일상 생활 속에서 생길 법한 사건을 잘 풀어냈다. (무슨 사건인지는 직접 가서 보시기를.)

네 번째 에피소드 <바다 사나이>에서 또 다시 유쾌한 분위기로 전환되자,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할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또 다시 무거운 분위기의 이야기를 선보일지, 아니면 관객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갈 수 있게 배려해주기 위해 웃음을 이어갈지 퍽 궁금해졌다.

잠시의 순간이 지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타나자, 이건 아닌 것 같은 데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등장 인물을 보는 순간, 즐거움도 슬픔도 아닌 지루함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황혼의 사랑-다시 만난 사랑> 초반부는 노인들 특유의 느린 말투가 등장해 내 예상이 틀리지 않을 것임을 80%정도 확신하게 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몇 번 들었던 '뻐꾸기로 연인 불러내기'라는 다소 식상한 소재가 등장하면서 연극을 향해 100%가 있던 집중력은 걷잡을 수 없이 하강하고 있었다.

그러다, 할머니가 젊은 시절 같이 야반도주했던 상황을 설명하며 할아버지를 탓하는 장면에 이르자, 이야기는 점차 힘을 받기 시작했다. 지루하기 그지 없을법한 말투이지만,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와 노인들의 사랑도 젊은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해준 상황 설정 덕분에 연극을 끝마치는 순간까지 재미있게 보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쓴 맛, 단 맛 다 본 노인들이, 약간은 웃기고, 약간은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어 슬픔과 유쾌함이라는 감정을 심하게 뛰어넘어 다녔음에도 안정적이고 편안한 분위기로 연극 관람을 마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마침내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하는 순간이 되자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또한 나오는 노래에 맞추어 배우들이 박수를 유도하며 박수를 치자, 관객들 역시 따라 치면서 영화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알았던 친구인양 관객과 주연 배우들간에 보이지 않는 친근감이 형성되었다.

비록 유명배우가 나오는 것도, 유명 공연장에서 하는 연극도 아니었지만, 지난 96년부터 무려 10년간 극단 오늘의 대표적 레퍼토리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가 그만큼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을만한 작품인 것을 반증해준다.

또한 거창함보다는 소박함이라고 할 수 있는 극의 내용들은 관객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게 해주었다. 가벼운 듯 하면서도, 그 안에 들어있는 일상적인 사랑에 대한 관찰들은 오히려 더욱더 자기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오래된 친구와 연인이 되고 싶은 이, 연인과 싸운 이들에게 주말을 이용해 보기를 추천하고 싶은 연극이다. <바다 사나이>에서 아내 역을 맡은 조민정이 책자에 써놓은 사랑에 대한 정의는 이 연극이 왜 많은 이들을 끌어당기는지에 대한 또 하나의 이유가 될 듯 싶다.

'사랑은... 하고 싶었고... 해보았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할 수 밖에 없는 것.'

덧붙이는 글 | 사람마다 보는 기준이 다르니, 마음에 드시지 않는 분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꽤 괜찮은 작품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사람마다 보는 기준이 다르니, 마음에 드시지 않는 분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꽤 괜찮은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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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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