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수제비 한 그릇 어때요?

수제비를 먹다보면 옛 추억이 떠오릅니다

등록 2005.07.09 22:04수정 2005.07.1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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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저녁에 수제비 끓여 먹을까?"


장인어른 입원하신 기독병원 다녀오던 길에 아내가 물었습니다. 당연히 좋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햇감자가 한창인 여름에 감자 썰어 넣어 끓인 수제비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구수하고 담백한 수제비만 있으면 열무김치 하나 덜렁 올려놓아도 즐겁게 먹을 수 있습니다.

집에 도착한 아내는 수제비 끓일 준비를 했습니다. 둘째 광수 녀석이 엄마 곁에서 기웃대며 밀가루 반죽을 해보고 싶다고 합니다. 엄마가 하는 일에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해보려고 하는 게 광수의 특징입니다.

반면에 첫째 준수 녀석은 엄마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엄마가 아무리 바삐 동동거려도 그저 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거실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더라도 식사 준비를 하는 엄마를 도와줄 생각은 안 하는 녀석입니다. 같은 형제라도 형인 준수와 동생인 광수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아내는 광수에게 손을 씻고 밀가루 반죽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광수 녀석은 손을 씻고 열심히 밀가루 반죽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아내는 감자를 깎았습니다. 냄비에서 물이 끓자 반죽한 밀가루를 뜯어 넣고 감자를 썰어 넣었습니다. 파와 고추도 썰어 넣었습니다.

아내와 광수의 합작품인 수제비로 상을 차렸습니다. 햇감자와 밀가루 수제비가 어우러져 보글보글 끓어올라 구수하고 담백한 수제비가 만들어졌습니다.


수제비 끓이는 데 한몫 했던 광수는 지금까지 먹어봤던 수제비 중에 제일 맛있다고 자랑했습니다. 수제비 끓이는데 별 도움을 주지 않았던 준수는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합니다. 녀석들의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내도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수제비가 있어 행복한 토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수제비를 먹으며 문득 내다본 창 밖에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빗줄기를 보니 문득 초가집 지붕을 타고 내려오던 굵은 낙숫물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재배한 밀로 만든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긴 장마철이면 어머니는 수제비를 자주 끓이셨습니다. 화로에서 끓인 수제비 한 그릇을 받아 마루에 앉아 먹다 보면 초가집 지붕에선 굵은 낙숫물이 쉴새 없이 마당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 낙숫물의 힘에 못 이겨 장마철이 끝날 무렵에는 마당에는 조그만 구덩이들이 지붕 둘레를 따라 줄을 지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초가집도 낙숫물도 구경하기 쉽지 않습니다. 수제비를 먹다 보면 그 긴 장마철의 기억들이 빛 바랜 흑백 사진처럼 떠오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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