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서해 해도. 오목한 섬의 중앙을 둘러싼 분지 산악길로 황토빛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꾸물거리듯 꿈틀거리듯 굽이굽이 이어지는 누런 행렬은 흡사 뱀이 빠르게 움직이는 모양 같았다. 황토 염료로 물들인 베잠방이 차림의 조련병들이 산 사이로 좁게 난 오솔길을 뛰고 있는 것이었다.
"하악, 하악."
크게 두 덩이로 나뉜 70여 명의 조련병들이 목울대를 긁어대는 거친 숨을 몰아쉬어댔다. 벌써 얼마를 뛰었는지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고 한 여름 햇살에 바삭해진 먼지가 범벅이 되어 때구정물로 흘렀다.
"으허허어......."
누군가 입에 거품을 물으며 뒤로 넘어갔다. 좁은 오솔길인지 넘어진 몸은 이내 비탈 아래 두어 길 밑으로 굴렀다.
"이봐, 만득이!"
나뒹군 자의 뒤에서 뛰고 있던 판개가 소리쳤다. 땅딸한 체구의 만득이란 사내는 바로 해도로 오는 배에서부터 말수가 많았던 땅딸보였다. 판개가 만득이를 살펴보기 위해 비탈을 내려서려는데 뒤에서 빽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냉큼 달리지 못할까! 네놈도 끼니를 거르고 싶은 게야!"
독사눈 조련관이었다. 나이 사십은 족히 돼 보이는데 도무지 지칠 줄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만득이가 엎어진 비탈로는 젊은 조련관 하나가 뛰어 내려갔고 판개는 달리던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나서 점심 끼니를 거른다는 걸 상상하기 싫은 탓도 있었지만 어차피 자신이 떠매고 올라온들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조련관들이 알아서 조처하도록 놓아 두는 것이 도와주는 거라 생각했다.
"판개, 너무 걱정 말어.. 헉헉..... 만득이 저 녀석 짐짓 꾀를 내는 게야."
판개의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영중이 뛰면서 말을 던졌다. 벌써 이십오 리 길을 족히 내달렸건만 영중은 아직 힘이 있어 보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판개는 대답할 여력이 되지 않아 멀건 눈으로만 물었다.
'그렇다고 저 놈이 밥을 포기할 놈은 아니잖우. 일부러야 그러겠수?'
하는 눈치였다.
"벌써 사흘째 낙오야. 저 방법을 쓰지 않으면 계속 끼니를 걸러야 해. 오늘은..... 하아, 하아..... 거품까지 물며, 넘어가는 꼴을 보니, 작정을 단단히 하였나 보이."
판개는 영중의 대답보다도 아직 말할 여력이 남아 있는 영중이 독하다는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독하기로는 독사눈 조련관(혹자는 그 자가 조련관들의 우두머리니 조련감이라고도 했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아니 영중은 독한 것이라기보다 체력이 따라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독사눈 조련관이 사십 대의 나이에 오기로 뛰는 것이라면 같은 연배라도 영중은 평소의 체력으로 뛰는 것이었다.
"거기 뭣들하는 게야! 그래 달리기를 하면서 잡담을 할 만큼 힘이 남는다 이말이지? 전부 제 자리~ 섯!"
독사눈 조련관이었다. 정지 구령이 떨어졌다.
"젠장할, 노친네가 귀도 밝지......"
옆에서 뛰던, 영중의 동생 영일이 투덜거렸다.
"전부 포복으로 저 능선을 넘어간다. 실시!"
모두가 엎드려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푸석푸석한 먼지가 뭉게 뭉게 피어올랐다.
"망할 독사놈의 스키.....꼭 제가 힘들면 우릴 고생 시켜."
젊은 영일이가 궁시렁댔다. 판개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독사눈 조련관은 한껏 조련병들을 누르며 따라 뛰다가도 제가 지치면 소리가 작다느니 속도가 줄었다느니 온갖 핑계를 대며 땅바닥을 기어가게도 하고 오리걸음을 걷게도 하며 못살게 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실상은 조련병이 태만해서가 아니라 독사눈 조련관이 쉬고 싶을 때 자행되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중은 땅바닥을 길 때든 땅위를 달릴 때든 지쳐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는 때가 없었다.
"헥헥...... 영중 성님은.... 어째 나이답지 않게 그리 날래시우? 영일 아우야, 헥헥, 젊으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판개의 말에 영중은 희미하게 웃어주었을 뿐 말없이 기기만 했다.
보름 전 배에서 내린 이후 사람들끼리 많이 친해졌다. 특히 '소대(小隊)'라는 이름을 지워 두 개의 덩어리로 사람들이 나뉘었는데 판개네 형제와 영중의 형제 모두 같은 소대에 편성이 되어 더 가까워진 탓 어느 새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비단 이들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 좁은 섬에 갇혀 한 솥밥 먹으며 몸 부대끼는 마당에 정분이 쌓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 터였다.
"그래도 처음 닷새는 섬 한 바퀴, 그러니까 십 리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다 못 뛰어 죽는 줄 알았는데 벌써 삼십 리 길을 뛰십니다요."
형 대신인지 옆에서 영일이 대답했다.
"예끼, 이 사람. 하루 세끼 밥만 먹고 달음박질만 하는데 고작 이걸 못하겠는가? 내 이래 뵈도 소시적에는 말이야......."
"거기! 기면서도 입을 벌리는 자가 누구야? 정녕 모두가 밥을 굶어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예의 독사눈 조련관의 고함이 뒤통수에 닿는 통에 말을 맺지 못했다. 뜨악해진 조련병들이 기면서 판개를 원망섞인 눈초리로 쏘아봤지만 고개를 땅바닥에 쳐박고 빠르게 줄달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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