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시원지에서 만나는 과거의 시간들

[중국 고구려 역사유적기행 3]오녀산에 구축한 고주몽의 이상향 홀본성

등록 2005.07.18 12:51수정 2005.07.1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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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는 사람은 환인에 도착하는 순간, 오래 전 그 모태의 본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환인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라고 할 수 있어 그 의미가 새삼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환인은 북한과 가까운 접경지역 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작은 소도시지만 시내는 비교적 깨끗하고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다. 옛 고구려의 첫 도읍지에 왔다는 느낌 때문일까, 왠지 친근한 감정이 느껴져 온다. 환인(桓仁)이라는 지명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을 자꾸 연상케 하는 것은 민족적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a 멀리 보이는 오녀산. 홀본성

멀리 보이는 오녀산. 홀본성 ⓒ 정윤섭

환인은 약 50만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도시로 한국에서는 50만도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중국에서는 소도시에 해당한다고 한다. 환인시내는 비류수(沸流水, 渾江)가 흐르고 있다. 이곳에 터를 잡은 고구려의 주몽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땅의 주인들에게는 젖줄과도 같은 강이다. 시내로 흐르는 혼강은 댐이 생겨 예전과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완만하게 시내를 통과하는 강의 전경이 아름답다.

만주족 자치현 환인

요령성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환인에는 조선족 교포가 약 1만명 가량 살고 있다고 한다. 생각보다는 작은 숫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은 만주족이 약 45%를 차지하고 있어 1985년 만주족 자치현으로 되어 있다. 이 때문인지 이곳에서의 가이드는 만주족 아가씨였는데, 까무잡잡한 피부에 쾌활한 성격의 아가씨가 만주족의 혈통을 잘 이어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소수민족인 만주족의 자치구라는 것을 말해주는 셈이었으며, 남방계로도 느껴지는 당찬 얼굴의 만주족 가이드는 조선족 가이드에 비해서는 분명 어떤 이질감이 느껴졌다.

a 산성안의 맷돌

산성안의 맷돌 ⓒ 정윤섭

이곳이 만주족의 자치현으로 된 것에는 중국정부의 의식적인(?) 역사에 대한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중국정부는 이곳이 고구려의 첫 도읍지라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조선족들이 민족의식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한 방책일수도 있을 것이다) 만주족의 자치현으로 만든 것이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환인은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를 거쳐 요(遼), 금(金)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청(淸)대에는 만주족의 발상지라 하여 이 지역 일대가 봉금(封禁) 되기도 하였다. 많은 민족들이 이곳을 근거로 끊임없이 쟁탈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러한 쟁탈의 역사는 그만큼 사람들이 살 만한 곳이자 전략적인 요충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환인은 홀본(忽本, 또는 卒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광개토왕비문에도 이곳을 홀본으로 말하고 있는데 보통 졸본으로도 말하고 있어 일반인들은 혼돈스럽기도 하다. 환인은 서기 3년(유리왕 22)에 도읍을 국내성(國內, 현 集安)으로 옮길 때까지 초창기 고구려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다.


a 산성위에서 내려다 본 환용호와 환인

산성위에서 내려다 본 환용호와 환인 ⓒ 정윤섭

따라서 환인 일대의 문화유적은 고구려와 관계된 것이 대부분으로 오녀산성(五女山城)과 고구려 초기의 도읍지로 여겨지는 하고성자고성(下古城子古城), 고검지산성(高儉地山城), 흑구산성(黑溝山城),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등이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이와 함께 고분으로 고력묘자고분(高力墓子古墳), 연꽃무늬가 그려진 벽화고분인 미창구(米倉溝) 장군무덤 등이 있으나 환인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어 있는 상태다.

우리가 묵은 숙소인 '정방호텔'은 일제 때 만들었다는 거대한 환인댐의 바로 아래쪽이었다. 5층 규모의 숙소는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건물이었는데, 호텔 숙소의 창밖으로 오녀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흐린 날씨 탓인지 선명하지 않았지만 사진으로만 접하던 오녀산의 모습이 눈앞에 다가오는 순간 작은 설렘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도저히 접근하기 어려울 것 같은 천혜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꼭대기에 산성이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홀본성은 그냥 보기에도 매우 특이하게 생겼다. 사진으로 미리 보긴 하였으나 산 정상부는 마치 거대한 돔 형식의 인공 요새가 만들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람도 쏘일 겸 호텔숙소 앞으로 나서자 야외에 생맥주를 파는 곳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친구나 가족끼리 나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야외 생맥주 집은 중국 사람들의 그 높고 빠른 톤 때문에 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은 소리로 정신이 없다.

a 오녀의 무덤

오녀의 무덤 ⓒ 정윤섭

중국 사람들은 먹고 즐기는 것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한다. 이들은 입는 것이나 기타 다른 분야에 투자하는 것 보다 먹는 것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저축을 하여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먹는데 투자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먹고 사는 것에 한이 맺혀서 보다는 그들의 유별난 식도락 문화라고 해야겠다.

생맥주를 파는 곳에서는 여러 가지 고기를 이용하여 가는 막대기에 끼워 굽는 꼬치구이를 주로 팔고 있었다. 시끌벅쩍한 분위기 때문인지 밤이 늦도록 야외 생맥주 집은 활기차 보였다.

다음날 숙소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오녀산을 바라보았다. 흐린 날씨 탓인지 오녀산은 흐린 시야 속에서 조금 아득하게 느껴졌다. 만주족 가이드가 답사 안내를 위해 일찍부터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을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세우고도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그 만주족의 후예였다. 이 자그마한 만주족 자치현에서 그 후예를 만난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한층 더 느끼게 한다.

버스는 '홀본성'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오녀산성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홀본성이 더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중국 측의 의도인지는 모르나 이곳의 책자를 비롯하여 모든 곳에 오녀산성이 공식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호텔숙소의 간이 상품 코너에는 몇 가지의 물품과 함께 책도 팔고 있었는데 몇년 전 발굴조사를 하였던 '오녀산성발굴조사보고서'가 눈에 띄었다. 보고서를 한 번 훑어본 때문인지 홀본성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a 옹성의 구조를 하고 있는 성문(서문)

옹성의 구조를 하고 있는 성문(서문) ⓒ 정윤섭

홀본성으로 가는 버스는 산의 중턱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매표소에서 산성이 있는 정상까지는 걸어서 약 30분이 소요된다. 정상까지는 돌을 깎아 만든 돌계단이 놓여 있으며 매우 경사가 급한 편인데 산성으로 가는 관광객들을 위해 가마꾼도 준비되어 있다.

걸어서도 오르기 힘든 그 경사진 길을 사람을 태우고 가마꾼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 안쓰러움이 앞선다. 휘어진 허리로 숨을 씩씩거리고 가마를 매고 가는 모습이 봉건 왕조시대에나 가능할 것 같은데 이곳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가마를 타고 산을 오르내리는데 중국 돈 약 2백위엔(한국돈 3만원 가량)을 주면 탈 수 있다.

고구려 건국신화

단군신화처럼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건국과 관련한 신화가 전한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이곳 홀본성과 관련되어 고구려를 세운 주몽(추모왕)에 관한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천제(天帝)와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 사이에 태어난 주몽(광개토왕비에는 추모왕)이 부여에서 탈출하여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추격병을 물리치고 이곳 환인에 도읍을 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건국신화는 '광개토왕릉비'에도 나와 있다. 광개토왕비에는 "추모왕이 비류곡 홀본(本)의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으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서쪽 산 위의 성을 바로 홀본성(오녀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홀본성은 해발 820m의 오녀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성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구축된 천연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오녀산(五女山)의 유래는 5명의 호걸여성이 이곳에 살며 주변의 가난한 주민들을 도와주고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던 곳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a 홀본성안의 대형주거지

홀본성안의 대형주거지 ⓒ 정윤섭

실제로 산 정상 부위에는 오녀의 무덤이라는 5개의 돌무덤이 있다. 신화적인 이야기 같지만 5기의 돌무덤이 오녀의 진짜 무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홀본성으로 쓰였을 때의 지배자계층과 관련된 무덤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곳 오녀산성으로 오르는 계단은 급경사다. 급경사 때문에 오르기 힘든 때문인지 계단 옆으로 우회하여 올라가는 작은 길이 만들어져 있다. 가마꾼은 옆으로 난 우회도로를 이용하여 올라가는데 그냥 올라가면 숨이 쌕쌕거리고 땀으로 옷몸이 흥건히 젖는다.

산성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에 있기 때문에 진입하는 곳이 정해져 있다. 진입하는 곳은 성의 서문으로 가는 길이 거의 유일한 길이다. 정상에 거의 가까운 곳의 좁은 협곡이 '천창문(天昌門)'으로 이곳을 지나면 성의 서문에 해당하는 곳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만 막아낸다면 성을 거의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을 것 같다.

드디어 정상에 다다르면 홀본성의 서문이 맞이한다. 성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서문터는 성벽이 엇갈리면서 한쪽벽이 다른 쪽 벽을 모나게 감싸는 옹성(甕城)의 형태를 하고 있다. 오녀산의 정상 부위를 모두 감싸고 있는 홀본성은 남북길이 약 1000m, 동서너비 300m 가량으로 타원형에 가까운 테뫼식 산성으로 되어있는데 동쪽으로만 성벽을 쌓은 흔적이 보일 뿐 거의 천연의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이곳 산성안에 현재 장대(將臺)와 천지(天池), 왕궁유지(王宮遺址)가 있으며, 왕궁터에는 초석 6개가 남아 있고 이 터를 고주몽이 살던 집으로 보고있다. 또한 군영지(軍營地) 등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몇 년 전 중국정부는 이곳에 대한 발굴 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발굴조사보고서를 책자로 만들어 판매를 하고 있었다. 보고서 책자에는 발굴당시의 모습과 관련된 유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당시 발굴조사에서 병사의 갑옷이 그대로 발굴되는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a 홀본성안의 천지

홀본성안의 천지 ⓒ 정윤섭

이곳 홀본성은 3개의 문이 있으며 가장 튼튼하게 만든 것이 동쪽 성벽의 남쪽에 있는 동문으로, 이문이 고구려 옹성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 산성안에는 여러 유적이 남아있는데 특히 이곳 해발 1000m가까운 암벽에서 나오는 천지(天池) 연못의 물이 지금도 수량이 풍부하게 고여있다. 당시 수천 명의 군사들이 식수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수량으로, 이 천지는 백두산 천지의 이름과도 같아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곳 산성의 가장 남쪽 끝에는 점장대가 있다. 이 점장대에 서면 산 아래로 환인 시내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일제 때 댐을 막아 호수가 된 '환용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호수는 마치 용처럼 생겼다고 하며 이 댐으로 인해 인근에 있던 고구려의 옛 고분이 수몰되기도 하였다. 점장대에 올라서면 환인 시내를 흐르는 혼강(渾江)을 끼고 넓은 환인분지가 펼쳐지고 있어 한 나라의 도읍을 정할 만한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 혼강은 동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이어진다.

이곳 홀본성안은 현재 어느 유명 관광지 못지 않게 잘 정비되어 있다. 돌을 다듬어 만든 계단이나 돌을 이용해 조성한 산책로, 나무계단이나 안내판 등 세심하게 정비되어 있어 중국정부에서도 이곳에 관심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성은 보통 전시에 사용하는 산성과 평화시에 사용하는 평지성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 홀본성을 전시에 사용하는 산성이라고 한다면 보통 평화시에 사용했던 평지성은 환인의 서북쪽 혼강을 끼고 있는 하고성자고성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의 주몽이 이 혼강의 강가에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평지에 있는 하고성자고성은 홀본성과 함께 혼강의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성과 홀본성은 거리가 가까워 서로 대응할 수 있고 또 출토된 유물들이 비슷해 같은 시기에 쌓은 것으로 보고 있어 학자들은 이 성이 왕이 기거하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평화시에는 이 성안에 살고 전쟁이 일어나면 홀본성에 들어가 지키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이 홀본성과 하고성자고성의 관계는 국내성과 환도산성, 대성산성과 안악궁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산성체계로 자리 잡는데 이 성을 발굴하면 고구려의 건국과 초기역사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a 홀본성을 오르는 가마

홀본성을 오르는 가마 ⓒ 정윤섭

홀본성을 다 둘러보고 내려와 차에 탈 때쯤이면 다리가 풀려 힘이 없어진다. 이때 이러한 피곤함을 식혀주는 것이 '환용호수'의 유람선이다. 오녀산에서 내려다볼 때 뱀처럼 몸을 비틀며 자리잡은 호수가 다시 환용호에서 유람선을 타고 바라보는 홀본성의 모습은 더욱 신비롭기까지 하다. 마치 천상에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려했던 고구려 시조 주몽의 꿈이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중국 땅이 되어있다. 그것도 한반도의 북한땅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은 이제 이곳 고구려의 역사 마져 중국의 지방정부로 전락시키고 있으니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이를 안다면 어떤 표정일까.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 고구려인들의 옛 숨소리가 들려오는 환인, 이 만주벌판은 언제나 남쪽 땅끝에서 대륙을 통해 자유롭게 이곳까지 달려 올 수 있을까. 환용호에서 바라다 보이는 오녀산은 많은 상념에 젖게 한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고려성' 식당

a 환용호에서 바라본 오녀산

환용호에서 바라본 오녀산 ⓒ 정윤섭

이곳 환인에는 조선족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 '고려성' 이 있다. 비류수(혼강)가 흐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성은 가이드 임문성씨가 추천한 곳으로 이름부터 이곳의 역사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젖게 한다. 이곳에서는 한국식 음식이 정말 풍성하게 나왔다. 돼지고기가 숭숭 썰어져 있는 김치찌개, 상추쌈을 위한 상치, 고추, 마늘, 김치 등등의 여러 음식이 모두 한국식이었다.

잔뜩 허기지고 몇 끼를 닉닉한 중국음식에 질려있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웬 떡이냐 하고 정신없이 음식을 퍼먹는다. 김치찌개가 얼마나 맛있던지 김치찌개의 양이 왜 이렇게 적을 수 있냐며 모두들 투정이다. 돈을 더 주고라도 먹을 테니 빨리 더 가지고 오라고 실랑이가 오간 탓에 심부름을 하는 아이와 주인이 약간 황당한 표정이었다.

a 홀본성안의 왕궁터

홀본성안의 왕궁터 ⓒ 정윤섭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지난해 6월 중순부터 일주일간의 일정으로 옛 고구려 역사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는 환인과 집안 등지를 비롯해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조선족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길 지역을 방문하였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지난해 6월 중순부터 일주일간의 일정으로 옛 고구려 역사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는 환인과 집안 등지를 비롯해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조선족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길 지역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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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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