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편제 소리 들어보셨나요?

동편제 소리의 맥을 잇는 정유진, 판소리 발표회 열어

등록 2005.07.18 19:03수정 2005.07.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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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동편제 소리에 혼신을 다하는 소리꾼 정유진과 고수 배기용 1

동편제 소리에 혼신을 다하는 소리꾼 정유진과 고수 배기용 1 ⓒ 김영조

"자룡의 거동 보아라. 의기 등등하야 활 든 팔 내루고, 깍지손 올려 허리 짚고, 음성을 호령하되 '이놈들 당양 장판교 싸움에 아두를 품에 품고, 팔마단창으로 위국 적병 십만 대병을 한 칼에 무찌르던 상산 조자룡이란 명망도 몰 들었는다?'"

위 내용은 판소리 '적벽가'의 '자룡 활 쏘는데' 대목이다. 이 적벽가는 예부터 동편제 소리를 하던 소리꾼들이 즐겨 불렀다. 이 힘찬 적벽가를 남자가 아닌 여자가 소리를 한다. 보통은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지난 7월 15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선 주로 미국에서에서 활동하던 정유진 소리꾼이 동편제소리를 계승하기 위한 공연을 했다. 공연의 이름은 '정유진 동편제(박록주/흥보가, 박봉술/적벽가) 원형보존 유파 발표 및 신나라 '정유진의 흥보가/적벽가' 음반출시기념 공연'이다.

동편제는 통성(뱃속에서 바로 위로 뽑아내는 소리)과 우조(웅장하고 화평한 가락)를 중심으로 소리를 한다. 감정을 절제하고, 소리가 웅장하며, 힘이 들어 있다. 또한 발성의 시작은 신중하지만 귀절의 끝마침이 명확하고, 소리는 쭈욱 펴며, 계면조 가락이 별로 없다. 그런 동편제의 창법과 가장 잘 조화되는 것은 '적벽가'이다. 그리고 이런 특성 때문에 동편제는 거의 남성 전유물처럼 생각돼 왔었다.

a 정유진 소리꾼

정유진 소리꾼 ⓒ 김영조

판소리의 유파는 크게 동편제, 서편제 그리고 중고제로 나누는데 지금은 동편제와 중고제의 명맥이 거의 끊어질 지경이다. 서편제는 소리의 색깔이 부드러우며 구성지고 애절한 느낌을 준다. 소리의 끝도 길게 이어지며, 부침새의 기교가 많고 계면조로 정교하게 부르기 때문에 대중의 인기를 받았고, 판소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선호한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런 동편제를 남성이 아닌 여성이, 그것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활동하며, 맥을 이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판소리 애호가들은 그날 공연자인 정유진이 생소하다. 아니 동편제 소리가 생소하다.

정유진 소리꾼은 분명 여성이다. 하지만 울려나오는 소리는 걸걸하고 거친 그러면서 호방한 소리가 난다. 소리만 듣고는 여성이라는 게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야말로 동편제에 아주 걸맞는 목소리이다. 그런데 가끔 소리가 잘 안 나온다. 건강이 많이 나빠진 탓이라 한다. 그런데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런데 또 하나의 아름다운 모습은 고수 배기용이다. 그는 전문 북쟁이가 아니다. 그저 북이 좋고, 소리가 좋아서 인간문화재 김명환 선생께 배운 이후 우연한 기회에 정유진과 함께 했고, 그때부터 둘은 늘 같이 해왔는데 90년대까지만 해도 직업은 건축학, 경제학과 관련된 일을 한 고수로서는 어쩌면 아마추어일 수 있는 그가 혼신을 다해 북을 두드린다.

a 고수 배기용

고수 배기용 ⓒ 김영조

공연을 관람한 국립국악원 김철호 자문위원은 말한다.


"준비과정에서 목에 많은 무리를 주어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소리의 내공이 많이 쌓였으며, 동편제의 맛을 잘 표현했다는 느낌이다. 국내무대 첫 공연의 부담이 있었을 텐데도 꿋꿋한 맛을 잘 살렸다는 생각이다. 고수는 수준이 높은데도 잔가락이 많고, 휘몰이 가락을 많이 쳐서 소리꾼이 부담이 될 수도 있었지만 전문 고수가 아닌데도 이 정도 북 반주를 한 것은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좋은 평을 받은 두 사람을 직접 만나 그들의 철학과 국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어떻게 여성으로서 힘든 동편제를 선택하고, 맥을 이으려는 생각을 했는지?
"어렸을 때부터 여성국극단을 쫓아다녔고, 임춘앵에 반했다. 그래서 아버지 몰래 판소리를 배우게 되었고, 박록주, 박봉술, 정광수 선생님께 본격적인 공부를 했다. 그러다 세계의 음악을 공부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워싱턴대에서 '무속이 한국 민속 민속음악에 미친 영향: 함동정월 가야금 산조에 기하여'란 제목으로 석사논문을 썼고, UC 싼타바버라 대학에서 '음양사상이 판소리예술에 준 영향'이란 제목으로 박사논문을 쓰면서 판소리의 철학을 제대로 알았다. 게다가 박봉술 선생님이 가르쳐준 동편제를 나중에 선생님이 내신 음반을 듣고 아니라는 생각에 새롭게 공부하면서 동편제의 매력에 푹 빠졌고, 이 동편제의 맥을 제대로 이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 판소리의 본고장인 한국을 떠나 왜 미국에서 판소리 공부를 하게 되었나?
"판소리가 한국에 머물러 있는 게 싫었다. 세계의 음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기 위해선 미국에 들어가 세계음악도 공부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 지금 와서 보면 결국 그때 옳은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석사, 박사 논문을 쓰면서 판소리의 철학에 제대로 눈을 떴고, 미국뿐만 아니라 파리 징가로 극단과 세계 순회공연을 하면서 판소리의 세계화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a 추모 씻김굿

추모 씻김굿 ⓒ 김영조

- 예술과 학문을 동시에 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소리를 하면서 학문의 길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물론 그렇다. 예술은 뜨거운 가슴으로, 학문은 차가운 머리로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둘을 공존시키는 게 쉽지 않아서 박사 논문을 쓰는데 30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후회도 없고, 정말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 정부나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일본만 봐도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되는 사회이다. 하지만 한국은 서양문화에 푹 빠져있어서 안타깝다. 우리의 이 훌륭한 전통을 살리려면 정부나 언론이 도와줘야 하지만 특히 기업들이 이익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적극 투자를 해야 한다. 돈 벌기에 급급한 기업이 아니라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지원하는 멋진 기업이 많이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 앞으로의 계획은?
"전통문화는 국악 하나만 발전시켜서는 안 된다. 모든 분야가 골고루 발전해야 한다. 그런 뜻의 작은 몸짓으로 공연 때에 전통수공예품 등을 전시, 판매, 교환할 수 있는 장을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석사, 박사 논문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고쳐서 세계인이 판소리를 제대로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책을 낼 예정이다. 그리고 후학들을 가르치는데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a 인터뷰하는 정유진씨와 배기용씨

인터뷰하는 정유진씨와 배기용씨 ⓒ 김영조

- 배기용님은 소리도 아니고 북에 푹 빠진 까닭이 무엇인가?
"북을 배우기 이전 국립국악원에서 김태섭 선생님께 장고를 배운 적이 있어서 이미 국악에 대한 이해는 있었다.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머물 때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판소리 공연이 있다기에 보러 갔는데 갑자기 고수가 못나오게 됐다면서 대신해줄 사람을 찾았다. 그때 내가 나섰고, 그 인연이 4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처음 북채를 잡았을 때 느낌이 너무 좋았다. 북은 힘이 있었고, 북채로 북등을 칠 때 나무와의 교감을 느꼈다. 김명환 선생님께 공부한 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 서양음악도 하고 있는데 한국음악과 어떤 것이 더 매력이 있나??
"어떤 음악이 더 매력이 있는가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양쪽 다 나름의 특색과 매력이 있다. 다만 서양의 재즈와 드럼은 아프리카 원시음악과 뿌리가 같다고들 하는데 판소리도 역시 같다는 생각이다. 판소리의 사설에 리듬이 들었고, 기본이 되는 12박이 바닥에서 같이 흐른다는 생각이다. 특히 한국음악은 극적인 면이 있고, 시적이며, 언어표현력이 있다는 느낌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들의 매력에 나도 덩달아 빠진다. 정씨는 강조했다.

"예술을 돈과 명예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 그저 예술이 좋아서 해야 한다. 특히 판소리는 꼭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나를 채찍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씨는 참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그것은 삶을 오로지 자신의 철학에 맞춰 정진해온 사람만이 갖는 그런 것이 아닐까? 자신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보다는 자신의 활동에 의해 동편제의 매력이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동편제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절절히 배어나오고 있었다. 이 뜨거운 여름 우리는 정유진의 판소리 음반(신나라뮤직/회장 김기순)으로 동편제의 시원한 소리를 가슴에 담아보자.

a 동편제 소리에 혼신을 다하는 소리꾼 정유진과 고수 배기용 2

동편제 소리에 혼신을 다하는 소리꾼 정유진과 고수 배기용 2 ⓒ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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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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