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치마에 티셔츠 입던 시절 여름나기

등록 2005.07.20 21:49수정 2005.07.2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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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해 보면 할수록 더욱 정겨운 우리들의 여름나기 이야기입니다. 제가 중학교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다섯 명의 친구들이 보낸 여름은 해마다 똑같았습니다.


"야호! 방학이다."

방학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는 시골에 사는 친구 집으로 갑니다. 지금 아이들이야 공부하라고 친구 집에 보내지도 않겠지만, 그 시절에는 친구 집에 가는 것은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던 충주에서 조금 떨어진 소이라는 곳까지 기차를 타고 갔는데 출발부터 도착까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던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며 갔습니다.

딸 친구들 네 명이 더해지는 많은 식구들의 끼니와 간식까지 모두 책임져야 했던 친구 어머니 생각을 하면 지금도 고마울 따름입니다. 싫은 내색은커녕 오히려 반색을 하셨지요.

우리들 복장은 우습게도 교복치마에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었지요. 한껏 차려입은 사복 차림은 고작 그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즐거웠습니다.

a 미루나무 가로수 시골길을 걸어가는 모습

미루나무 가로수 시골길을 걸어가는 모습 ⓒ 허선행

기차에서 내려 20분 정도 걸어야 했는데 논둑 밭둑길을 걸으며 두 팔로 자연바람을 안고 비행기 날개 모양을 하며 뛰어 가던 기억이 납니다. 기차에서 내려 친구 집에 도착할 시간에 맞춰 친구 어머니께서 만들어 놓으신 간식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동네 한 바퀴는 물론, 들로 산으로 쏘다녔지요.


얌전한 여학생의 모습을 버리고 선머슴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우리 집에서는 상상도 못하셨을 겁니다. 친구 집에서 보내는 여름 나흘은 내게 일탈을 꿈꾸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숨 막히도록 엄하셨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해방이었습니다.

그 시절 제 친구 아버님은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친구 아버님이 근무하셨던 학교도 우리 다섯 명에게 훌륭한 놀이터가 되곤 했습니다. 넓은 운동장과 잘 가꾼 화초 사루비아, 칸나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플라타너스 그늘에 앉아 꿈 많은 여학생들의 이야기가 이어졌지요.


a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 허선행

방학이라 조용한 교정에 울려 퍼지던 매미소리도 정겹게 들렸지요. 그렇게 한참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배가 출출해질 때가 되어서야 친구 집으로 향합니다.

지금은 보기 드문 키 큰 미루나무 가로수 길을 횡대로 서서 돌아올 때는 뙤약볕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먹을 감자를 닳은 숟가락으로 껍질을 긁어 놓는 작업은 우리 몫이었는데, 마당 한 구석에 놓여 있는 가마솥에 넣고 친구 어머니가 들기름으로 볶다가 쪄서 노릇노릇해진 감자를 꺼낼 때면 우리들 모두 침을 꼴깍 삼키곤 했지요.

"너는 고추장을 줘야지."

찐 감자에 설탕을 찍어 먹는 친구들과는 달리 저는 고추장을 소스처럼 발라 먹었는데 어머니는 그것까지도 기억하십니다. 하긴 여름마다 가니 딸 친구 식성을 꿰뚫을 만 하지요.

여름에 내 식구 밥해주기도 힘든데 지금처럼 에어컨이 있는 것도 아니요 선풍기도 없는 부엌에서 일하시던 어머님! 딸 친구들 놀러 온다고 야외전축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곡은 '베사메무쵸'라는 곡이었는데 노래가사를 잘 못알아듣겠다며 "배추쌈에 무쳐"라고 고쳐 부르셔서 우리들 배꼽을 쥐게 만드셨습니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모깃불로 피워 대는 약쑥 냄새를 맡으며 커다란 멍석에 드러누워 옥수수를 먹었지요. 낮에 우리가 밭에 가서 깔깔대며 한 바구니 따 온 옥수수입니다. 그 시절 바라보던 하늘에는 어쩜 별이 그리도 많고 총총하게 빛나던지 그 후로 그렇게 많은 별을 보지 못했습니다.

깜깜한 밤이 되면 손전등으로 길을 밝히며 개울가로 목욕을 갔는데 누가 훔쳐보기라도 할까봐 마음 졸이던 스릴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압니다. 게다가 장난기가 발동한 한 친구가 머리를 얼굴로 내려뜨리고 손전등을 비추며 귀신소리를 내면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 악을 쓰곤 했지요. 처음에는 발만 담그고 온다는 것이 서로 물을 튀기다 보면 이내 물 속에 서로를 처넣게까지 되곤 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제 나이를 잊고 어느덧 여학생시절로 돌아가 봅니다. '그래 그때는 그랬었지.'

지금 아무리 에어컨을 틀어도 더위가 가시지 않는 것은 한밤중 이가 덜덜 떨리도록 춥던 개울가에서 등목을 하던 추억을 잊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지금은 모두 50대를 훌쩍 넘어버린 친구들. 사진 속 친구들과 지금도 그 때처럼 모두 모여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름을 시원하게'에 응모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여름을 시원하게'에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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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현직 유치원 원장으로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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