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에서 더위와 맞장뜨다

바위나리와 함께 떠난 여행 5 - 더위 속에서도 쑥쑥 자라는 생명체들

등록 2005.07.23 11:18수정 2005.07.2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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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오기만 하면 뭘 그렇게 찍니?”


시골집에 들르기만 하면 카메라 들고 들녘으로 쏘다니는 내게 허리 굽은 어머니가 하신 말씀입니다. 뒤란 그늘에서 돗자리 펴놓고 미숫가루 얼음물에 타서 먹으며 쉬라고 해도 말도 안 듣는다며 성화를 하십니다.

“얼마 안 걸려요. 갔다 와서 먹을게요.”
“얼릉 갔다 와.”

고집 센 건 꼭 누굴 닮았다며 어머니는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굽은 허리에 다슬기 잡아다 팔고 옥수수 삶아다 파는 어머니가 안쓰럽게 보이듯이, 직장에 얽매어 시달리다 휴일이라고 와서 쉬지도 않고 쏘다니는 아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입니다.

쏟아지는 햇살만 뜨거운 게 아니라 논두렁에서 내뿜는 열기 또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카메라 잡고 논두렁의 생명체들을 둘러보는 정도입니다. 호미 쥐고 콩밭 매는 것이나, 낫 들고 논두렁 깎는 것에 비하면 거저먹기나 다름없습니다.

이기원

제일 먼저 만난 녀석들이 메뚜기 입니다. 도랑 가 논두렁에서 자라는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있습니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메뚜기란 녀석은 낯가림이 심합니다. 카메라를 피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칩니다.


다가가면 다가간 만큼 가지나 잎사귀 뒤로 몸을 숨깁니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길에 원망이 담겨 있습니다. 녀석에게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면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말할 거 같습니다.

“왜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이기원

벼 잎사귀에는 또 다른 메뚜기 두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마주보고 다정하게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등 돌리고 앉아 있습니다. 한바탕 싸움이라도 한 기세입니다. 녀석들에게도 말을 할 기회를 주어볼까요.

“이젠, 너와 끝장이야.”
“흥, 누가 할 소리.”
“다시는 너 같은 녀석 만나지 않을 거야.”

이기원

녀석들이 등 돌리고 씩씩대는 곳에서 멀지 않은 논두렁 콩잎에는 쉬파리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며 살아도 짧은 세월인데 싸움은 왜 하냐며 메뚜기들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기원

풍뎅이도 있습니다. 펑퍼짐하게 생긴 녀석이 꽤나 둔해 보입니다. 둔한 만큼 행동도 굼떠 손을 뻗어 잡기도 쉽습니다. 그래도 녀석에겐 날개도 있습니다. 녀석을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다보면 손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릅니다.

무너진 논두렁에 심은 두릅나무 잎사귀가 무성합니다. 무성한 두릅나무 잎사귀에 하늘소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품위 있는 갑옷에 위엄 있는 더듬이까지 갖춘 녀석입니다.

이기원

어린 시절 하늘소는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녀석의 더듬이를 손으로 잡고 길바닥 돌 위에 올려놓으면 하늘소는 버둥대며 다리로 돌을 집어 올립니다. 누구의 하늘소가 더 큰 돌을 집어 올리나 아이들끼리 내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아이들은 이 곤충을 하늘소란 이름 대신 돌집게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기원

노린재 한 마리가 콩잎에 앉아 있습니다. 향수 대신 노린 냄새 풍기며 사는 녀석입니다. 그게 제 목숨 지키는 재주입니다. 메뚜기 잡아서 놀아도 보고 풍뎅이 잡아 다리에 실을 묶어 날려보기도 했습니다. 하늘소 더듬이 쥐고 돌멩이를 집어 올리며 놀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린재 잡아 친구들과 놀아본 경험은 없습니다.

한 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들녘의 생명체들은 더위에 주눅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더위를 몸 안 가득 받아들여 쑥쑥 자라납니다. 녀석들의 그 대견한 모습에 반해 그 뒤로도 한동안 들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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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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