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 장 대가(代價)
농한기의 막바지인 이월 하순은 평생 땅을 파먹고 사는 소작인들에게 혹한의 추위보다 굶주림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시기였다. 허리가 부러져라 한 여름철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쏟은 대가는 한 겨울을 겨우 연명해 갈 정도. 자식이라도 많으면 턱없이 모자랐다. 더구나 작년처럼 흉작이라도 드는 해엔 여지없이 씨를 뿌리기도 전에 씨앗마저 먹어치우지 않으면 굶어죽을 판이었다.
호노삼(胡老三)이 아무리 땅을 살 돈을 모아 놓았다고는 하나 이미 축을 내기 시작한 돈은 손가락 사이로 물이 빠지듯 사라지고 있었다. 모으기는 어려워도 쓰기는 너무 쉬운 것이 돈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땅뙈기라도 마련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접은 지 오래였다. 그저 자식 놈들 빨리 분가라도 시켜 제 입에 풀칠이라도 했으면 하는 것이 이제 그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헌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커다란 걱정에 빠졌다. 이미 줄어드는 돈에 대한 걱정은 체념한지 오래인지라 이젠 걱정도 아니었고, 자식 놈이 어디 가서 사고를 쳐서도 아니었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이 일은 오히려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불안해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상도(常燾)란 놈이 쌀가마니가 그득한 수레를 끌고 오더니 아무 말 없이 호노삼의 툇마루 끝에 다섯 섬이나 던져 놓고는 가버린 것이다. 비단 한 필도 덧붙여 말이다. 무슨 일이냐고 아무리 물어도 상도란 놈은 묵묵부답이었다.
본래부터 상도란 놈이 천성이 된 놈이라면 덜 불안했을 것이다. 지주 하기진(厦起振)의 충복으로 오히려 하기진보다 더 날뛰며 소작인을 괴롭혔던 작자가 바로 상도였다. 더구나 상도 자신과는 달리 호노삼이 면천한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보이고 있던 놈인지라 갑작스런 호의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같이 온 작자들도 하기진이 시키기도 전에 소작인을 닦달하던 작자들이어서 더욱 불안했다.
하가의 젊은 주인도 소작인이 죽든 말든 신경 쓸 작자가 아니었다. 요사이 인심이 흉흉해지고 노골적으로 하가의 젊은 주인을 욕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그런 정도로 이리 쌀을 내놓을리는 만무했다. 어떤 흉계가 있을지 몰랐다. 이것을 받아먹고 올 가을 추수에 몇 배를 거두어 갈지 모를 일이었다.
호노삼은 그것을 건들지 않고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아무래도 저것을 다시 하가로 싣고 가져다주어야 할 것 같았다. 괜히 손댔다가 날벼락 맞을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굶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그의 걱정은 새벽같이 찾아 온 왕노인으로 인하여 더욱 큰 걱정거리로 변했다.
"백련(白蓮)이야… 백련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지. 미륵불께서는 그리 먼 장래에 오시는 게 아니야. 도솔천이 반드시 하늘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우리는 이제 살만한 세상을 보게 될 것이야…."
그리고는 호노삼의 집 처마 아래 걸어 둔 조악한 연화를 바라보며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그러지 않았던가? 집집마다 연화를 걸어 놓으면 복된 세상이 올 거라고…. 자네도 이제 미륵불에 귀의하게나…."
경덕진(景德鎭)의 함노인(咸老人)이 가진 요사이 낙이라면 처마 밑에 달아 놓은 십여 개의 연화백자가 내는 맑은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도요의 불을 지펴 만들어낸 연화백자가 삼십여 개. 이리 저리 달라는 사람들을 나누어 주고는 자신이 특별히 구운 열개 정도의 연화자기를 처마에 둘러가며 달아 놓자, 마치 절간의 풍경(風磬)처럼 맑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더구나 특이하게 처음부터 연화자기를 구울 때부터 처마에 달아 놓으려 생각한 것이라서 연꽃 모양의 자기를 만들고, 그 안에 연화가 지고 나면 연자(蓮子)를 품고 있는 연실(蓮實) 주머니 모양을 만들어 안에 달아 놓으니 연화자기 속에서 연실이 움직여 맑은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어떤 기대를 걸고 만든 것도 아니었고, 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굽지 못한다는 생각에 만든 것이라 자기로서의 가치도 없었지만 함노인은 자신이 만든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했다.
손이 근질거리면 밀가루를 반죽해 모양을 만들고, 쓰지 않을 장작만 애꿎이 패는 일도 많았지만 그는 경덕진을 떠나지 않았다. 과년한 딸이 그나마 곁을 지켜 주어 외로움은 덜했지만 평생 해온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애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더욱 늙게 만들었다.
헌데 어느 날 아침 그는 자기 소리가 울리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해 방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난장판이 되어 있는 바닥을 보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연화자기는 모두 깨져 있었다. 어젯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심하게 불긴 했어도 이렇듯 깨질 것은 아니었다. 마치 자식을 잃은 듯한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놀랄 일의 시작일 뿐이었다.
"아버님!"
함노인은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들리자 화들짝 놀랐다. 목소리는 변했지만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금방 알았다. 마치 환청을 들은 듯 사라질까봐 함노인은 금방 몸을 돌리지 못했다. 정말인가? 정말 내 아들이 온 것일까?
"곡(鵠)이냐?"
함노인은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아니하였다. 돌아보면 사라질 것 같았다. 바닥에 흩뿌려진 연화자기의 파편이 빚어내는 햇살의 잔영처럼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아니 꿈이라면 조금 더 꾸고 싶었다.
"불효자식… 곡이옵니다."
꿈은 아니었다. 분명 함노인도 꿈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노안에 뿌연 이슬이 차올랐다. 십칠년 만에 부자가 상봉하는 자리에서 애비가 눈물이라니… 하지만 자식을 보고 싶었다.
"정말 곡이로구나…!"
함노인은 몸을 돌렸다. 이슬이 차오른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식 앞에 눈물을 보이는 애비가 되기는 싫었지만 나오는 눈물을 어쩌랴!
아들은 변해 있었다. 언제나 맑고 깊은 빛을 품고 있었던 아이의 눈은 마치 분노가 타오르듯 핏발이 서 있었고, 여아처럼 곱던 피부는 구릿빛으로 변해 거칠게 보였다. 깎지 않은 짧은 구레나룻이 떡 벌어진 어깨와 더불어 강인함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더구나 아들은 검을 차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모습이었지만 함노인의 눈을 찌르는 것은 그의 옷 곳곳에 묻은 핏자국이었다. 자기 따위는 굽지 않겠다고 녹로(轆鑪 - 도차 陶車)를 팽개치고 떠난 아이였다. 그리곤 흙 대신 검을 들고 온 것이다.
저 아이가 떠날 때 함노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붙잡지도 않았다. 어차피 도공의 삶이란 것이 그렇고 그런 것이었고, 문하로 들어와 일을 배우겠다는 제자 놈들도 그의 문하에서 오년을 넘기는 놈이 없었다. 그저 알량한 기술 몇 가지를 익히면 자기의 깊은 맛을 모르고 훌쩍 떠나가기 일쑤였다. 그것은 자기를 굽는 것이 말로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외곬의 가르침과 함가의 도요는 함가의 씨가 이어받아야 한다는 그의 고집 탓이기도 했다.
"어쩐 일이냐?"
말이라도 부드럽게 해줄 것을… 불쑥 입에서 나오는 데로 토해낸 것이 금방 후회를 가져왔다. 십칠 년 만에 집에 돌아 온 자식에게 어쩐 일이라니….
"일이 있어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
아들은 일어나 돌아 선 함노인에게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일어난 것을 보니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버린 아들.
"가…가봐야 한다는 것이냐?"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아무리 외곬으로 고집스럽게 살아 온 함노인이라 해도 이때만큼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불효자식을 용서하소서… 수년 내에 돌아와 아버님을 모실 때까지 옥체 보중하시길…."
함노인은 무어라 말을 하려했다. 아들의 완강해 보이는 눈가에 이슬이 뿌옇게 차오르는 것을 보며 무어라 하려 했다. 하지만 함노인이 앞을 가리는 눈물을 잠시 훔치는 사이에 아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었다.
"곡아… 곡아…!"
사방을 둘러가며 외쳤지만 사라진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 꿈이었을까? 어찌 꿈이라도 이리 야속할까? 함노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 사흘을 보낸 후 함노인은 딸아이가 전하는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 나흘 전 저녁에 조가(趙家)의 조대인과 그 식솔 일곱 명이 살해되었데요. 대가 끊겨 도요의 불을 지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지주대인(知州大人)하구 그 동안 어도요 때문에 꿍꿍이를 벌이던 관속(官屬)들도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더군요.
- 죽은 사람 가지고 욕하는 건 잘못된 일이지만 천벌을 받은 것이래요. 모두들 누가 저지른 짓 일인지 모르지만 너무 잘했다고 하고 있어요.
함노인은 탄식했다. 그의 텅 빈 동공 속으로 아들의 옷에 묻은 핏자국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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