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가방'속엔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나

[서평] 안규철의 <그 남자의 가방>을 읽고서

등록 2005.07.26 14:29수정 2005.07.26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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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현대문학
사물에는 보이는 의미와 보이지 않는 의미가 있습니다. 보이는 의미는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틀 속에 놓여 있으며, 보이지 않는 의미는 틀의 바깥에 놓여 있습니다. 보이는 의미를 포착해내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보이지 않는 의미를 캐치해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책읽기 또 다른 즐거움...사물의 숨겨진 의미찾기


우리가 미처 포착해내지 못한 사물의 의미를, 우리보다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의 글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책읽기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철학하는' 조각가 안규철이 쓴 <그 남자의 가방>은 책을 읽는 독자에게 그런 즐거움에 안겨주는 책이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은 그가 월간 <현대문학>에 '사물들,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들을 다시 손질해서 내놓은 책입니다. '안규철의 사물에 관한 이야기'란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상상력을 통해서 이미지 너머에 숨겨져 있던 의미를 짚어내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가 놓은 징검다리를 딛다보면, 우리도 어느 새 낯선 사물의 의미 속으로 건너가게 된답니다.

책은 먼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면서 바깥 세계를 관찰하고 생각하고 지휘하는 머리, 안으로 꽁꽁 뭉쳐진 자아가 바깥 세계를 향해 내뻗는 촉수인 손, 가장 아래에서 사유와 노동의 도구로서 기능하는 발 등 인간의 몸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머리...개체의 아이덴티티를 함축하는 기호

진화를 거듭한 인간은 네발동물의 운명적 조건을 벗어나서 자신의 신체를 수직으로 세웠습니다. 그 수직의 신체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고집하는 것이 바로 머리입니다.


저자는 싸움을 "타인의 머리를 완력으로 땅바닥에 머리를 눕혀 자신의 발과 같은 위치에 두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에게 있어 인사란 또한 "한 개인에게 최고의 지위에 있는 것(머리)을 내려다봄으로써 인사받는 사람은 가만히 있는 채로 상승하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저자는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는 관습, 높은 계단과 좌대로 이루어지는 건축양식마저 모두 머리와 그 시선의 높이를 함축하는 인간관계의 위계질서를 확인하고 고정시키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손...인간의 운명과 한계를 함축하고 있는 도구

그에게 있어 손이란 먹이 '운반의 통로'입니다. 그는 '인간적인 삶'이란 생물적 생존에 쫓겨 입과 입 사이에 먹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끼워 넣을 수 없는 삶이 아니라, 손과 입 사이의 '여백'이 있는 삶을 의미하며, 손과 입 사이에 어떤 도구가 끼어드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손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 가운데 가장 탁견인 것은 아무래도 엄지 손가락이 가부장제의 원형이라는 해석일 것입니다.

"네발로부터 두 앞발이 분화된 데 이어 다시 엄지의 분화가 일어나고, 이어서 왼손과 오른손이 분화하는 셈이다. 이로써 손이 새로운 권능을 얻는 대신에 손가락들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질서가 생겨났다. 엄지는 네 손가락들에 대해서 골고루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엄지만이 나머지 네 손가락에 하나하나에 대한 선택권이 있고, 모두를 한꺼번에 휘어잡을 수 있다. 손의 이러한 위계질서는 가부장제의 가장 뿌리깊은 원형이라 할 것이다."

발...존재의 영역을 확장하는 도구

그는 만일 인간의 발이 지금처럼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었다면 인간은 식물이나 뱀에 가까웠을 것이고, 넷으로 남았더라면 네발짐승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발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발을 경멸하고 천시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일례로 식탁에서의 발의 역할이 그것이지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발을 (아울러 동물적 육체를) 소외시키는 데 종사하는 기구이다. 그 근본적인 용도는 허리 높이에 또 하나의 지평면을 설치하여 머리와 손의 영역을 발의 영역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다. 몸이라는 집 속에 동거하는 것들 사이에 1등석과 2등석의 칸이 나눠진다."


이 '측은한' 발을 위한 그의 항변은 끝내 이렇게까지 말하게 됩니다. 발이 없었으면 길도 없었을 것이라고.

집, 그리고 그 안에 놓인 사물들의 세계로 다리놓기

그가 앞장서 이끌고 있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사유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인간의 몸이 거주하고 있는 집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집은 원래 나의 연장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 몸을 외부세계와 차단하는 나의 피부의 연장이며, 확장된 나의 외투“라고 앞서의 말을 더욱 자상하게 풀어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것이 그가 말하고 집에 대해 말하고 싶은 전부는 아니랍니다.그는 집이 가진 폐쇄성에서 권력의 속성을 읽어내고 싶어 합니다.

"권력은 내가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데서 생겨난다. 한 사람이 갖는 권력의 크기는 집의 크기와 그 밀폐성의 정도에 비례한다."

그리고 그는 집이 나의 연장이며 나의 외투라고 했던 앞서의 진술을 뒤엎어버리고, 집이 우리의 형태를 변형시키고 규정지으려든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는 우리가 옛날처럼 '정든 집'에 살려고 하기보다는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돼 있는 여행자처럼 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벽지를 바꾸고, 베란다를 개조하고, 액자를 걸고 화초를 가꾸는 일조차 그가 보기엔 자신을 감추기 위한 '꾸밈'에 지나지 않으며, '상자갑 속의 삶'을 은폐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점차 집 안에 놓인 의자, 책상, 상자와 가방에까지 미칩니다. 의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는 의자의 형태와 배열이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를 얘기합니다.

그가 보기에는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조종사나 운전기사의 보호와 명령체계에 편입돼야만 하는 비행기나 고속버스 여행은 여행의 과정 자체가 희생되는 것이랍니다. 그는 기차여행이야말로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가 여행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여행이라고 말합니다.

되레 그는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도착만을 기다리는 여행, 내일만을 기다리는 인생이란 얼마나 황량하냐고.

이 책의 제목이자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그 남자의 가방>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작품 속에서 그는 천사가 맡겨놓은 한 쌍의 날개가 들어 있는 가방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전시장에 온 관객들은, 그 가방 안에 정말 날개가 들었는지를 물을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음 속에 날개가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림과 말의 경계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의 예술관을 이해할 수 잇게 되었답니다.

그리하여 나는 달아난다...나를 잡아보라

<그 남자의 가방>을 빼고도 그는 자신의 몇 몇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작품이 탄생한 과정을 말하고, 작품에 얽힌 사유의 내력을 말하기도 합니다.

아홉 살 때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로 보내졌던 자신의 성장기와 그때 생긴 외로움에 대한 내성을 이야기 하고, 도시와 시골 어느 쪽에도 고향이 없었던 이방인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인식을 읽어내려 가다보면 하나의 예술가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됩니다.

책의 맨 뒤에 나오는 '토끼와 사냥꾼' 이야기에서 예술가를 토끼에, 관객 혹은 독자를 사냥꾼에 비유하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달아난다. 나를 잡아보라."

늘 달아나는 사람, 남보다 몇 발짝 앞에 가며, 사물이 던지는 고정된 의미의 그물망에 포획되지 않으려 애쓰는 한 예술가의 사유의 길을 따라 가는 여정은 책을 읽는 내내 저를 즐겁게 했답니다.

덧붙이는 글 | 책 이름:그 남자의 가방 
저자:안규철
출판사:현대문학
가격:1만5000원

덧붙이는 글 책 이름:그 남자의 가방 
저자:안규철
출판사:현대문학
가격:1만5000원

그 남자의 가방 - 안규철의 사물에 관한 이야기

안규철 지음,
현대문학,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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