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를 먹어라!" 삼성, 전방위 로비

97년 숨가빴던 막전막후... X파일 공개로 전모 드러나

등록 2005.07.26 22:33수정 2005.07.2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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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앞.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앞.연합뉴스 형민우

“이제 뭔가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애. (97년 당시에) 이미 몇 년전부터 업계에선 삼성이 어떤 식으로든 기아차 인수한다고 했었거든. 정치권, 언론 등 치밀하게 움직인다고 했는데...”

26일 전 대우자동차 고위 임원을 지냈던 김아무개씨의 말이다. 이날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는 최근 불거진 ‘삼성 X파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털어놨다.

그는 “날짜를 맞춰보면 그냥 나오지 않나. (삼성의) 보고서 유출과 자금회수, 정부의 부도유예대상 처리, 그리고 법정관리, 입찰 참여 등...”이라며 “그때 의문으로 남았던 정부와 여당의 스탠스를 이번 테이프가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번 사건은 97년 당시 자동차업계의 화두였던 기아자동차 처리에 정치권과 재벌, 언론 등이 어떻게 물밑으로 치밀하게 움직였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검찰은 이날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 자체와 내용 등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특히 이미 공소시효가 끝나버린 삼성의 불법 정치자금 제공과는 별도로, 기아자동차 인수 시도 과정에서의 금품 전달과 수수 의혹에 대해 검찰이 어떤 결과를 내놓을 지 주목된다.

기아차 인수 조건으로 5000만원 이상을 제공했다면 아직 처벌이 가능하다. 특가법상 공소시효가 10년이기 때문이다. 참여연대가 지난 25일 삼성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전직 경제부총리 등을 검찰에 고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97년 기아차 인수를 둘러싸고 숨가쁘게 벌였던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삼성의 움직임을 다시 들여다 봤다.

97년 10월, 초상집으로 변한 도쿄 모터쇼 기아차 부스


97년 10월 23일 오전 11시 일본 도쿄 모터쇼장. 기아자동차 부스에는 국내에서도 선보이지 않은 신차 ‘카니발’ 등 10여대의 차량이 전시돼 있었다. 어려운 자금 상황속에서도 모터쇼에 참가한 기아차 임직원들은 이들 신차와 함께 재기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시각 서울. 강경식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이들을 향해 폭탄선언을 내린다. 기아차에 대한 법정관리 방침이다. 전격적이었다. 모터쇼 현지 기아차 직원들은 “잔치집이 돼야할 모터쇼가 초상집이 됐다”고 했고, 일본에 있던 김선홍 전 기아회장과 박제혁 전 기아차 사장은 서울로 급히 돌아왔다.


당시 경영혁신기획단 송병남 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최근 경영난에 빠진 기업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형평성을 잃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기아차 임직원들은 공장 가동을 중단한 채, “기아차 죽이기가 본격화 됐다”고 성토했다.

이들의 ‘기아차 죽이기’ 배경에는 특정재벌의 음모론과 정부의 불신이 깔려있다. 김 전 회장은 지난 99년 1월 국회에 출석해, “삼성이 금융계열사 등을 통해 빌려줬던 5000억원대의 자금을 거둬들였고, 결국 기아가 파산에 봉착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97년 3, 4월 삼성의 2가지 X 파일... "기아차를 접수하라"

법정관리 결정 4개월 전인 97년 6월. 그동안 기아차 인수에 완강히 부인해 온 삼성의 속내가 드러난 보고서 하나가 공개된다. 같은해 4월 삼성자동차 산업분석실에서 만든 ‘자동산업의 구조재편 필요성과 지원방안 보고서’가 그것.

‘구조재편 보고서’는 자동차업종의 구조조정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세제지원과 규제완화 등 정부의 지원도 요구된다고 적고 있다. 이어 국내 자동차시장의 전반적인 공급과잉 속에서 업체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면서, 기아자동차의 경우 ‘성장의 한계에 직면했다’고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8월 22일께 또 다른 보고서가 공개된다. 삼성그룹에서 3월4일에 만들어진 ‘신수종(新樹種) 사업추진현황 및 향후 계획 보고서’다. 보고서는 “기아자동차는 회생은 물론 독자적인 경영이 힘들다”고 적고, “따라서 그룹 자동차 사업의 조기 경쟁력확보를 위해 전략적 인수를 추진하고... 기아자동차 인수 분위기 및 여론을 점차 조성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두 보고서를 보면, 3월에 그룹차원에서 기아차 인수를 위한 전략이 세워지고 한달여 만에 정부차원의 지원 요구까지 나아가고 있다. 특히 ‘신수종 보고서'에서는 이미 “기아인수를 위해 정부와의 공고한 공조체제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결국 삼성이 기아 인수 초부터 정부를 등에 업고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물론 기아차 임직원을 비롯해 시민사회단체 등은 “정부와 삼성간의 강한 유착의 증거”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삼성은 물론 ‘실무차원에서 폐기했다’는 등으로 부인했다.

세풍의 마지막 모자이크 조각 지난 세풍사건에서도 드러나지 않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왼쪽)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구체적인 관계가 일명 'X파일'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세풍의 마지막 모자이크 조각 지난 세풍사건에서도 드러나지 않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왼쪽)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구체적인 관계가 일명 'X파일'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오마이뉴스

97년 4월, 이학수 부회장 "(경제)부총리에 3~5개 주라"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연합뉴스
삼성이 정부의 등에 업고 가겠다는 의지의 바탕에는 당시 경제팀이 삼성에 우호적이라는 계산이 깔려있다. 당시 경제팀을 이끌고 있는 강경식 경제부총리의 경우 지난 94년 부산 신호공단 유치위원장으로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을 적극 추진했었다.

다른 대기업과 달리 기아차 처리에 미적거렸다는 지적을 받아온 당시 경제팀은 ‘신수종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삼성 비호 의혹이 기정사실화 됐다.

실제 당시 기아차 종업원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던 이아무개씨는 “당시 소문으로 나돌았던 정부와 삼성간 커넥션이 당시 보고서로 드러났던 것”이라며 “이후 법정관리 처리 등의 과정에서도 다른 부실기업과는 다른 잣대를 적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정부와 삼성간 커넥션을 또다시 입증할 수 있는 증언이 최근에 다시 나왔다. 삼성그룹 차원에서 기아차 보고서가 만들어진 97년 4월, 이학수 삼성 부회장과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은 새 경제 부총리의 지원 방안을 논의했던 것.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를 입수한 문화방송(MBC)는 지난 24일 홍 사장과 이 부회장은 같은해 4월 시내 모처에서 만나 경제부총리 지원을 논의했다고 전했다. 방송을 보면, 홍 사장이 부총리에게 인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이 부회장은 3∼5개 정도를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삼성쪽이 정부의 경제 고위관료에 거액의 촌지를 제공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회창-김대중 등 정치권도 "기아차 인수, 힘 보태겠다"

정부 차원의 삼성에 대한 비호 의혹은 정치권에도 이어졌다. 특히 당시 여당 대표였던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는 실세 측근에 삼성인맥이 포진해 있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삼성 편들기에 나서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기아차가 부도유예협약 기업으로 선정된 7월 중순. 강경식 부총리와 이회창 대표가 만났다. 강 부총리로부터 기아사태를 보고를 받은 이 대표는 “중소협력업체의 피해가 최소화하도록 정부가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라며 원칙론을 폈다. 당시 이 대표의 기아사태 해법은 정부 입장을 그대로 지지하고 있었다.

이 대표의 측근 가운데 대표적인 삼성인맥으로 꼽히는 사람은 고흥길 당시 특보와 이흥주씨다. 고 특보는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냈고, 이씨는 삼성 고문 출신이다.

특히 최근 안기부의 불법 도청 테이프는 기아차를 둘러싼 삼성과 정치권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은 이학수 부회장에게 "(이회창 후보가) 기아에 대해 답을 줬다"면서 "자기가 힘을 보태겠다고..."라는 말을 전한다.

당시 야당후보였던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도 "(기아차 문제에 대해)인수 복안을 공론화 시켜주면 당내 정책위에 검토시켜 가능한 도와주겠다"는 약속까지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정부와 정치권의 협조(?)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기아차 인수에 실패했다. 98년 공개입찰에 나섰지만, 내부적인 삼성자동차 부실에 따른 자금난을 스스로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8년여 시간이 지나 터져나온 ‘삼성 대선자금 X파일’은 지난 97년 기아차 인수를 위한 삼성의 막후공작 실체 전모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은 “언론을 통해 삼성의 기아차 인수를 위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고, 집권당과 관료에 돈을 뿌린 대신 기아차 인수 지원사격을 얻으려는 정부-재벌-언론의 부적절한 삼각 공생관계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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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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