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30회

등록 2005.07.27 07:55수정 2005.07.2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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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장천의 모습은 매우 초췌했다. 한달여의 역혼기를 보내고 난 뒤 보름여가 흘렀지만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한달이라는 기간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비몽사몽을 헤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나이라는 것도 속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 해가 다르게 체력이 회복되는 시기가 늦추어지고 있었다.

"노야께 죄송스럽게 되었습니다."


대사형 장철궁(張徹躬)은 섭장천에게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음은 큰 문제였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믿지 못할 말이구나. 하지만 너야 확신이 없으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

섭장천은 지나온 일들을 곱씹어 보았다. 과연 누구일까? 누가 언제부터 이런 일을 벌여 온 것일까? 정말 자신들의 눈을 피해 모종의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섭장천의 말대로 장철궁의 말은 언제나 믿음이 있었다. 장철궁이 나이만으로, 무공만으로 백련교의 희망인 첫째로 지목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고, 사제들을 배려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네 혼자만의 생각이냐?"

섭장천은 그의 말을 믿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번 더 확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운령과 상의했습니다."

운령이라면 신주귀안의 친손녀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운령마저 못 믿는다면 더욱 큰일이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 아이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운령을 못 믿는다면, 아니 운령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 있다면 우리 모두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삼년 전부터 모든 계획이 그녀의 머리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문득 섭장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 말이 맞겠지. 그 아이를 믿을 수밖에 없지. 만약 그 아이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신주귀안의 생각일 테니까…."

"그 점은 섭노야께서 수고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잔결방(殘缺幫)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냐?"

잔결방. 불구인 인물들이 세운 방파. 이미 그들 중 일부는 오룡번 사건 때 장안루에서도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주귀안 등 과거 균대위에 의해 불구가 된 인물들이 은밀하게 모여 만든 방파가 잔결방이라고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섭노야께서는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형제 중에 무언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들 사형제는 모두 전대 균대위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전대 인물들의 혈육이거나 제자였다. 그렇다면 분명 배후는 있을 터였다.

"어차피 스물 네 개의 시신은 각 방파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런 정도라면 물불 안 가리고 들이닥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신중합니다. 극히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구파일방과 철혈보, 그리고 그 외의 무림방파를 말함이었다. 시신을 보았다면 분명 그들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들이닥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분명 무언가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점 역시 누군가가 그들에게 암중에서 정보를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분명히 온다."

"예상보다 늦고 있습니다. 자칫 암중에서 장난을 치는 자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장철궁은 자칫 자신이 계획한 일이 틀려질까 걱정이었다. 전 무림인들은 오히려 숨죽이고 있었다. 물론 은밀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러한 행동은 대의(大義)라는 명분을 가진 그들이 취할 행동이 아니었다. 만약 천마곡에 있는 절대구마의 후인들에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자신의 계획은 틀어질 수 있었다.

섭장천은 장철궁을 직시했다. 뻔히 전 무림이 움직여 이곳에 들이 닥칠 터인데 자신에게 잔결방으로 떠나라는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천마곡 안에 남아 전력에 도움이 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다고 장철궁이 자신을 무시해서 한 말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어찌할 셈이냐?"

장철궁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 역시 수도 없이 고민해 온 일이다. 그는 문득 탄식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들이 언제 오던 천마곡 내로 들어 온 자들은 살아서 천마곡을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천마곡에 있는 자들 역시 살아서 천마곡을 나갈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섭장천은 장철궁의 비장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자신을 태우지 못하면 대사(大事)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장철궁의 생각은 고육지책이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이제 희망이 보이는 시점에서 자신을 먼저 희생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맏이란 그래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절대구마의 후인들은 가공할 힘을 키웠다. 그들을 제어하는 일은 지금까지 장철궁의 몫이었다. 헌데 그런 상황이 언제부터인지 자신의 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속한 조직의 누군가에 의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에 자신의 등 뒤에서 칼을 꽂을지 모르는 일. 오히려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장철궁은 자신의 희생으로 그것을 막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내부의 적을 찾아내기 원하는 것이다. 섭장천은 당혹스런 감정을 느꼈다. 장철궁은 선이 굵은 아이였다. 웬만한 상처는 씨익 웃고 마는 아이였다. 사제들의 잘못에 먼저 무릎을 꿇고 대신 벌을 받는 아이였다.

"바보 같은 녀석."

"운령 자신이 장본인만 아니라면, 운령은 반드시 이번 기회에 암중의 인물이 누군지 밝혀낼 겁니다."

섭장천은 탄식했다. 내심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탓했다. 자신 역시 음모니 흉계와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터라 어떠한 조언도 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 아이에게는 다른 입이 있다."

그 순간 장철궁은 퍼뜩 깨달았다. 그렇다. 운령의 입이 되는 존재는 당새아라는 아이였다. 만약 운령의 생각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운령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당새아란 아이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는 정말 조심해야 했다. 한 치 발을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무림인들이 몰려오기 전에 모두 떠나게 할 셈이냐?"

"그렇습니다. 우리 형제들까지 희생시키면 안 될 일입니다. 사제들은 마지막 순간에 보낼 생각입니다."

이곳 절대구마의 후인들에게 눈치를 채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오직 운령과 섭장천에게만 말했다.

"노야께서는 기회를 보아 측근들을 데리고 연동(蓮洞)으로 빠져 나가십시오. 무림인들의 이목이 예민해져 있는 만큼 알려지면 섭노야의 움직임을 파악당하면 잔결방에 도착하기도 전에 화를 입기 쉽습니다."

"연동(蓮洞)이라…?"

이미 잊고 있었던 통로였다. 처음부터 균대위에 의해 천마곡에 끌려 들어와 무공을 상실한 채 오로지 탈출로를 만들기 위해 균대위의 눈을 피해 이십여 년 동안 조금씩 파고 들어가 만들어 놓은 탈출로였다. 결국 완성도 하기 전에 담명 장군의 죽음으로 균대위가 사라지자 내버려 두었던 곳이었다. 아마 장철궁은 그것을 완성시켜 놓은 모양이었다.

"네 생각은 바꿀 수 없는 것이냐?"

섭장천의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에 장철궁은 두 눈을 꿈뻑이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기 전에 보이는 소의 표정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시작된 일이었다. 지금 그만 둘 수 없음은 섭장천 역시 알고 있는 터. 하지만 자식처럼 가르치고 키운 아이들 중 하나를 잃는다는 것은 자식을 잃는 슬픔과도 같다. 장철궁은 얼굴에서 서글픈 미소를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살아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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