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보다 '배'가 더 많은 작은 섬 '재원도'

'부서파시'의 영화 사라지고 '새우잡이'로 산다

등록 2005.08.04 15:05수정 2005.08.06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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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도 포구에는 두 개의 작은 슈퍼가 있다. 말이 슈퍼이지 식당과 만물상을 겸하고 있다. 이른 저녁 선착장 슈퍼 앞에는 네댓 명의 선원들이 평상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있다. 요즘처럼 새우를 잡을 수 없는 금어기엔 저녁은 물론 새벽에도 선원들은 시원한 맥주를 몸을 다스린다. 오죽했으면 선주들이 선원들에게 외상술 주지 말라고 했을까.


외상으로 술을 먹고 선원들이 갚지 않으면 그 책임은 아무래도 선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가불하여 쓰다보면 새우 잡이를 하기도 전에 다음해 임금까지 끌어다 쓰는 일도 생긴다. 이러다 뭍에 나갔다 돌아오지 않으면 선주입장에서는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a 두리대섬, 대섬, 상항월도(오른쪽 부터) 세 섬이 선명하게 보이고 재원도가 뒤로 희미하다(임자도 하우리에서 촬영)

두리대섬, 대섬, 상항월도(오른쪽 부터) 세 섬이 선명하게 보이고 재원도가 뒤로 희미하다(임자도 하우리에서 촬영) ⓒ 김준


a 재원리 모습

재원리 모습 ⓒ 김준

'새우'로 사는 작은 섬

재원도는 전남 신안군 지도읍 점암에서 배를 타고 임자도를 거쳐 1시간여 걸리는 인구 160여 명의 작은 섬이다. 재원도에는 버스는 물론 승용차도 없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뒷산에 올라가면 한눈에 누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할 정도이다. 오전 오후 두 번만 열리는 뱃길이 외부와 유일한 통로이다. 지난 8월 1일 임자도 진리에서 3시에 탄 오후 배엔 새우잡이배 선원인 듯한 2명, 20여 년째 마을우체부 일을 하는 함근산 어르신, 그리고 필자가 전부였다.

재원도는 행정구역으로 임자면에 속하지만 임자면 진리선착장에서도 뱃길로 40여 분이나 걸리며, 비금, 자은 등과 함께 서남해의 큰 바다와 접해 있는 유인도서인 까닭에 뱃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섬이다.

a 닻배 머리(이물)에 커다란 닻이 보인다.

닻배 머리(이물)에 커다란 닻이 보인다. ⓒ 김준


a 새우잡이를 할 수 없는 금어기인 탓에 포구에 닻배들이 즐비하다.

새우잡이를 할 수 없는 금어기인 탓에 포구에 닻배들이 즐비하다. ⓒ 김준

재원도는 50여 척의 배들이 새우를 잡아 생활하고 있다. 마침 금어기인 탓에 대부분의 선원들은 8월 15일까지 포구에 머물면서 그물을 교환하거나 터진 그물 꿰매고, 배도 수리하는 등 하반기 새우잡이 준비를 한다. 농사라 해야 마을 뒷산을 개간하고 사람이 살다 떠난 집터를 일궈 고추, 상추 등 밭농사를 짓는 것이 전부이다. 예전에는 높은 구릉까지 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모두 묵히고 있다.


재원도는 총 45호에 이르지만 선박은 50여 척에 이르기 때문에 산술적으로 보면 가구당 1척 꼴이다. 하지만 실제로 배를 가지고 있는 호수는 20여 호에 불과하기 때문에 호 당 두세 척의 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들 배를 '닻배'라고 하는데 각각 선원 5, 6명이 배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4틀의 그물을 가지고 새우를 잡는다. 배들이 포구로 들어오는 날이면 재원도 마을 앞에는 200여 명의 선원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주민들보다 훨씬 많다. 이들 선원들은 대부분 목포직업소개소를 통해서 배를 타게 되며, 선장을 비롯해 선원들도 등급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진다.

임자도 새우잡이가 커다란 자루 모양의 그물('팔랑개비 그물'이라 함)이지만 재원도 새우잡이는 '닻 그물'을 이용해 새우를 잡는다. 쇠로 만든 닻채의 길이만도 10미터 달하는 닻을 이용해 그물을 바다에 고정시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닻 그물은 서남해역의 대표적인 새우잡이 방법으로 폭 4미터에 길이 8미터 그물 23폭을 바다에 드리워 그물에 붙은 새우를 잡는다. 그래서 새우를 잡는다는 표현보다 '새우를 턴다'고 한다.


a 조업중인 닻배의 모습

조업중인 닻배의 모습 ⓒ 김준

전장포의 새우잡이 팔랑개비 그물을 이용해서 잡는다. 자루 모양의 그물이 조류에 따라 빙빙 돈다고 하여 '팔랑개비 그물'이라고 한다. 마치 주목망을 연상케 하는 팔랑개비 그물은 새우뿐만 아니라 잡어들이 많이 들며, 고기가 들어 있는 그물 끝 자루를 들어 올려 뭍으로 가지고 와서 잡어와 새우를 추리는 일을 한다. 반면에 닻 그물을 이용해서 잡은 새우는 배 위에서 새우와 잡어를 구분하여 소금과 버무려 새우젓을 담는다. 팔랑개비 그물에 비해서 잡어가 적게 들기 때문에, 새우들이 바닷물에 가라앉고 잡어들은 뜨는 특성을 이용해 쉽게 새우를 추려낸다.

a 닻그물을 만들고 있는 주민

닻그물을 만들고 있는 주민 ⓒ 김준

닻 그물을 이용한 새우 잡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그물'이다. 일찍부터 재원도 주민들의 그물 만드는 솜씨는 서남해 새우잡이 선주들에게 소문나 있었다. 하루에만도 드는 물과 나는 물 두 번씩 4번을 바닷물에 담그고 빼기를 반복해야 하고, 조류를 이용해 새우를 잡기 때문에 그물은 단단하고 조밀하게 마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폭의 그물을 만드는데 1만여 원으로 배를 가지고 있지 않는 주민들 중에는 그물 짜기로 생활을 하기도 한다. 벌써 400만원을 넘어 1000만원의 소득을 올리는 주민들도 있다.

닻배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해에 1억 원 정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봄철 조업을 끝나고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선원들이 먹고 쓰는 비용인 대략 3000만 원, 선장을 제외한 인건비 3000만 원, 선장 인건비 3000만 원 등 금방 확인되는 비용만 1억 가까이 들어간다. 최근 능력 있는 선장은 3500만 원까지 달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에 기름 값, 그물비용, 선박 수리비용 등 각종 비용을 고려한다면 1억원도 부족할 때가 많다, 결국 한 해 조업으로 3억 원 정도 벌어야 선주가 돈을 좀 만져볼 수 있다는 계산이다.

a 금어기가 풀리는 8월 15일 포구에 보관 중인 닻을 싣고 새우잡이에 나선다.

금어기가 풀리는 8월 15일 포구에 보관 중인 닻을 싣고 새우잡이에 나선다. ⓒ 김준

팔도의 배들이 모였던 '재원파시'

부서가 많이 잡히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인천배, 강화배, 여수배, 군산배 들이 재원도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선원을 상대로 한 목포, 비금, 흑산의 장사배들도 아가씨들을 싣고 속속 재원도로 모여들어 모래밭에 벽돌로 담을 쌓고 '막'을 차렸다. 아가씨들이 많을 때는 12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지금은 제방을 쌓고 방파제를 만들었지만 당시에만 해도 모두 모래바탕에 벽돌집이어기 때문에 큰 파도나 비바람이 불면 그대로 막 안으로 들이쳐 집들이 무너지기도 했었다. 재원파시는 부서가 사라지고서도 인근어장에서 병치, 민어, 새우 등 고급어종들이 많이 잡혀 1980년대 후반까지 파시가 지속되어, 서남해안에 가장 늦게까지 존속한 파시였다.

흔히 주민들이 파시의 규모를 말할 때 섬과 섬을 배를 밟고 건너갈 정도로 배들이 많았다는 것과 아가씨들이 몇 명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재원리 건너편은 임자도 삼두리이며 옆에 목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다. 지금도 날씨가 좋지 않아 배가 운항을 하지 않으면 사선을 이용해 임자도로 건너가는 곳이 목섬이다. 과거에 재원도 주민들은 노를 저어 나룻배를 타고 갈 때도 목섬에 배를 대고 십리 길을 걸어서 임자도 소재지로 일을 보러 다녔었다. 1970년대 재원파시가 한창일 때 수백 척의 배들이(2~3천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재원리에서 임자도 목섬까지 꽉 들어차 건너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a 1970년대 마을 앞 '막'(술집)이 들어섰던 곳은 시멘트로 포장하고 축대를 쌓았다.

1970년대 마을 앞 '막'(술집)이 들어섰던 곳은 시멘트로 포장하고 축대를 쌓았다. ⓒ 김준


a 재원도 '부서파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좁은 골목

재원도 '부서파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좁은 골목 ⓒ 김준

뿐만 아니라 '무역선'이 떠서 배에서 직접 얼음을 만들어 잡은 고기를 갈무리해 일본으로 수출을 했다고 한다. '배에서 직접 얼음을 만드는 무역선'은 당시 주민들에게는 매우 신기하고 놀라운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1960년대에 고기들이 지천이었지만 절이거나 말리는 방법 외에 산지에서 냉동 보관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보관한 싱싱한 선어들은 대부분 여수상인들에 의해서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재원 하우리에 거주하는 유대두(60)씨는 재원도와 노록도 사이에서 한 사리에 요즘 돈으로 300~400만원어치 고기를 잡기도 했다. 당시 부서 잡이를 하던 어민들은 바다에 나가기만 하면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에 돈을 버는 대로 '막'에 들려 아가씨들과 술을 먹기도 했었다. 술이라고 해봐야 소주와 맥주 그리고 안주는 과자부스러기 정도였지만 아가씨들과 술을 먹기 때문에 십여만 원은 금방이었다고 한다.

a 재원어촌계 깃발을 단 선박

재원어촌계 깃발을 단 선박 ⓒ 김준

당시에만 해도 재원도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지 않았다. 배를 짓거나 그물을 가지고 고기잡이를 하지 않았었다. '뗏마'를 타고 외지 배들에 물이나 나무 등을 가져다주고 고기를 얻기도 하고 돈을 받기도 했었다. 주민들 중 일부는 '막'을 지어 장사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극히 소수였다. 재원도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고기잡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파시가 쇠퇴할 무렵인 1980년대이며 재원도 인근 어장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외지 배들을 보면서 기술을 익힌 이후 일이었다.

가끔씩 봉사활동을 오던 대학생들도 초등학교 문을 닫으면서 발길이 끊겼다. 재원도는 지금도 고기잡이 선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섬이다. 200여 명의 선원들이 몸을 의지하며 생활하는 작은 섬. 전장포보다 훨씬 많은 새우가 재원도 닻배들에 의해서 잡혀 팔리고 있다. 이제 섬은 사람이 얼마나 사는가에 보다 섬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의해 필요한 개발과 보존의 방향이 결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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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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