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각시'랑 늦바람 난 사나이

잉걸아빠가 사는 법(11)을 일단락 지으며

등록 2005.08.05 07:54수정 2005.08.05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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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걸아빠는 요즈막 신났다. 기운이 펄펄 난다. 괴테가 나이 일흔 넷에 손녀 같은 열아홉 살 '레베초'를 향해 연정을 불태웠을 때 기분이 이랬을지 모른다. 물론 잉걸아빠는 고희는커녕 지천명도 멀었다. 어쨌거나, 늙은 괴테도 사랑 어쩌고 하며 재랄을 떨었는데 잉걸아빠 아직 혈기 왕성하니 까짓 거, 마음만 먹으면 눈 먼 여자들 댓 명 줄 서 있을 터(?).


"남자들 바람나기 딱 좋은 나이야. 잉걸엄마 조심해야 돼. 더군다나 잉걸아빠 외관이 좀 빤들거리잖아. 나갈 때 보면 꼭 기름독에 빠진 생쥐, 어머 미안! 호호호, 아무튼 좀 그렇잖아. 관 속에 누운 남편도 다시 한 번 들여다봐야 하는 판에, 몰라? 남자들이란 그저 잠깐만 한눈 팔면 딴 짓하는데 이골이 난 족속들이거든, 알겠어?"

"우리 애 아빠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빤들빤들하게 다니는 건 학생들 만나야 하니까 신경 쓰는 거구요. 또 설사 눈 맞는 여자가 있더라도 돈 없어서 바람 못 펴요."

동네 아줌마들, 골목 그늘에서 수다 떠는 걸 우연히 듣다가 나는 픽, 웃고 만다. 사실을 말하자면 잉걸아빠는 아내 두고 딴 짓거리할 깜냥도 못 되거니와 정말 돈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왜냐? 안 그래도 아내한테 죄 지은 게 많은데 그것도 모자라 바람까지 핀다? 사람도 아니지. 그러면 잉걸아빠가 대체 무슨 바람이 들었기에 괴테가 어쩌고 하냐하면, 레베초 따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리따운 우렁각시가 새벽마다 나타나기 때문이거든.

잉걸아빠 우렁각시, <오마이뉴스>

a 잉걸아빠 우렁각시. 새벽 퇴근 뒤 컴퓨터를 켜면 화면 속에서 우렁각시가 어서 빨리 놀자고, 어서 빨리 입 맞추자고, 잉걸아빠를 재촉한다.

잉걸아빠 우렁각시. 새벽 퇴근 뒤 컴퓨터를 켜면 화면 속에서 우렁각시가 어서 빨리 놀자고, 어서 빨리 입 맞추자고, 잉걸아빠를 재촉한다. ⓒ 이동환

잉걸아빠는 한 삼 년 '눈팅' 독자로만 머물다가 작년 늦봄이던가, <오마이뉴스>에 기자회원으로 가입했다. 일 년이 넘도록 전혀 활동하지 못한 이유는 먼저 다니던 학원에서 너무 일에 파묻혔기 때문이다. 오후 두 시까지 출근해 새벽 두 시는 돼야 끝나는 데다가, 부원장인지 뭔지 하나 떠맡다 보니 허구한 날 회의다 뭐다 술독에 빠져 살아, 마음 뜬 젊은 강사들 다독이느라 또 술독을 휘젓다보면 갓밝이에야 퇴근하기 일쑤였다.


지난 5월, 잉걸아빠는 어쨌든 잘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외도 끝에 돌아온 본령이라지만 일반 입시학원에서 붙박이로 나이 먹는다는 게 너무 서글펐다. 예전처럼 다시 논술단과를 알아봤지만 나이가 걸림돌이었다. 누가 써주기만 하면 단박에 옛날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오라는 데가 없었다. 에이, 젊은 강사들 투정받기 노릇이나 해주며 월급이나 챙기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자 후회가 일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지만 전화는커녕 지나가는 개도 아는 척을 안 했다. 과외 몇 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잉걸네 밑 빠진 항아리 살림 어림없었다. 금세 한 달이 지나갔다. '방콕'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오마이뉴스>에 접속하는 시간이 덩달아 늘어났다. 그런데 이거, 가만 보니 그전에 간간 접속하던 때와는 영 달랐다. 시민기자들 활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잉걸아빠도 기사가 쓰고 싶어졌다. 그러다가 지난 6월 20일 새벽, 지인들과 술 한 잔 나누고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은 잉걸아빠는 단숨에 한 꼭지를 써버렸다. 밤새 세계청소년축구대회를 안주 삼다가 열 받은 터수에 술도 안 깬 상태에서 기사를 썼던 것이다. 스포츠에 문외한인 잉걸아빠가 '한국축구 어설픈 꿈에서 깨어나라'는 표제로 한국축구행정이 어쩌고, 축구협회가 어쩌고, 해댔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런 엉너리가 없다.

나중에 보니 잉걸에 떡하니 올라 있는 게 아닌가. 두 번째 기사인 '난 늙어서 약장수 구경 다니고 싶지 않다'가 mT(메인톱)에 오르면서, 더구나 방송국 취재요청까지 받으면서, 잉걸아빠는 홀라당 기사쓰기 재미에 빠져버렸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해도 시원찮은 판에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으니 아내 눈초리가 고울 리 없었다. 단 열흘 동안 일곱 꼭지 기사를 써 올렸고 그 가운데 하나는 특별원고료 대상까지 되었다.

시기와 우연, 그리고 인연이란 참 묘하다. 그렇게 일자리를 찾아다닐 때는 동네 도둑고양이까지 째려보며 무시하더니 6월 30일, 응모기사였던 '당신, 아직도 나 사랑해요'를 올리던 날 오후부터 연락이 쏟아졌다. 살면서 이런 일은 없었다. 이제는 오히려 갈 데를 골라야 할 정도였다. 7월이 되자마자 잉걸아빠는, 과외 몇 건으로 간신히 생색이나 내던 신세를 메다꽂고 안양권에서 가장 탄탄하기로 이름난 논술학원 강사자리를 단숨에 꿰찼다.

첫 강의에 두 명으로 시작해, 나간 지 일주일도 안 돼 여섯 개 반을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계속 기사를 썼다. 얼마나 바쁜지 그야말로 오줌 누고 바지 추어올릴 짬조차 없었다. 더구나 고3 수시 준비가 겹치는 바람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지난 7월 한 달 동안 잉걸아빠는 열두 꼭지 기사를 올렸다. 오늘 현재, 이 기사 이전까지 모두 21개 기사를 쓴 셈인데 생나무라 아궁이에서 도로 꺼낸 기사 두 개까지 합하면 23꼭지다.

이 무더위 속에서 나름대로 참 열심히 일한 셈이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어떤 독자는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른다.

"아, 그러니까 잉걸아빠! 요는 너무 바쁘다는 거 아니우?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니까 강의에 매달리기 위해 당분간 접겠다, 뭐 그런 거죠?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한창 논술 어쩌고 뜨는 분위기에 돈 좀 벌어보겠다 이 말씀 아뇨? 저기 위, 부제 보니까 '잉걸아빠가 사는 법을 일단락 지으며'라고 썼군 그래. 그러게 옛말 그른 거 하나도 없어. 빨리 끓는 냄비가 빨리 식는다니까. 안 그래요, 잉걸아빠? 어쩐지 유난을 떨더라."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

그럴 일은 절대 없다.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이 보고기사는 쓰지도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잉걸이 녀석에게 재산 남겨줄 능력 못 되는 깐에 '아빠는 이렇게 살았노라'는 뜻이나 버무려주자고 블로그에 정성 쏟는 인사가, 자판 건드릴 힘이 남아 있는 한은 일주일에 반드시 두 개 이상 기사를 쓰겠노라 스스로에게 다짐한 치가, 우렁각시에게 흠뻑 빠져 온 정신 다 놓은 이가 핫바지 방귀 새듯 사그라질 리 절대 없다는 말이다, 암만!

a 잉걸엄마! 이 사진 찍을 때 내가 약속했던 거 제대로 지킨 게 없어서 미안해. 그러나 지난 45일 동안 당신에게 약속한 일들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반드시 지킬 게. <↑ 니들이 개기름을 알아? 기사에도 올렸던 사진임>

잉걸엄마! 이 사진 찍을 때 내가 약속했던 거 제대로 지킨 게 없어서 미안해. 그러나 지난 45일 동안 당신에게 약속한 일들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반드시 지킬 게. <↑ 니들이 개기름을 알아? 기사에도 올렸던 사진임> ⓒ 이동환

이 기사에 쓴 부제는 새로운 다짐과 발전을 위한 작은 선언일 뿐이다. 이제 조금 눈을 뜬 게, 인터넷신문이 무엇인지, 그 역할이 어때야 하고, 시민기자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눈곱만큼이나마 이제 막 마친 상태다. 1차 발견은 기사 폭이 너무 좁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봤댔자 앞으로도 '사는 이야기' 뒤란에서 주로 서성이겠지만 말이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잉걸아빠는 대단한 변화를 겪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제 술을 거의 안 마신다는 사실이다. 7월 중순 이후로는 동료 강사들이 집 근처로 오겠노라 살살, 아무리 샅을 긁어도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왜냐? 이제 외롭지 않고 할 일이 넘치니까.

지난 45일 동안 대취한 일은 <오마이뉴스> 선배기자를 만났던 날밖에 없다. 이전 학원에서는 허구한 날 소주 기본 두 병씩, 일주일에 두어 번은 혀가 말릴 때까지 마셔대던 술을 끊다시피한 것이다.

아내가 너무 좋아한다. 기사쓰기에 매달리는 나를 보고 "대체 오마이뉴스가 당신한테 뭐죠?"하던 아내가 지금은 "오늘은 뭘 쓸 건데요? 정말 술 생각 안 나요?"하면서 신기한 듯,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런 일도 있구나. 열두 시간만 지나면, 그러니까 하루 두 번은 꼬박 술 생각에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던 치가 술 냄새를 잊다니.

모두 다 우렁각시 덕분이다. 갓 한 달 근무한 학원에서도 얼굴색 나날이 좋아져, 학생들 꽉 잡아당겨, 처음에는 나이 많다고, 좀 늙어 보인다고, 너무 근엄해 보인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원장 입 꼬리가 하루하루 다르게 귀에 걸린다. 잉걸아빠 요즈막 세상 부러운 게 없다. 어머니가 좀 많이 아프시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하다. 여기서 더 무엇을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다.

내 평생, 술에 취하지 않고 밤새 글써본 일은 <오마이뉴스>와 함께 했던 시간이 전부다. 물론 앞으로는 쭉, 계속일 테지만 말이다. 그전에는 술에 취해야만 글을 쓰고는 했다. 생각해보면 참 미친 짓이었다.

아 참! 첫 기사는 아까도 고백했지만 대취 상태에서 썼다. 그거 딱 하나다.

덧붙이는 글 | 제 자랑 늘어놓은 꼴이 되어 죄송합니다. 혜량 있으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제 자랑 늘어놓은 꼴이 되어 죄송합니다. 혜량 있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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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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