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검찰에 서는 '이건희의 그림자'

[인물탐구] 이학수 삼성 부회장 9일 출두... 어떻게 2인자 됐나

등록 2005.08.07 18:43수정 2005.08.0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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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 본부장이 2002년 불법정치자금 제공 혐의에 대한 검찰 조사를 위해 대검에 출두하고 있는 모습.
지난해 2월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 본부장이 2002년 불법정치자금 제공 혐의에 대한 검찰 조사를 위해 대검에 출두하고 있는 모습. 남소연
지난 2004년 6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최완주 부장판사). 피고인석에는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59·부회장)이 서 있다. 최 판사는 "385억원의 자금을 (이건희 회장에게) 아무런 얘기없이 사용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된다"고 추궁했다.

이 본부장의 답변이 이어진다.

"(이건희 회장의 재산은) 주식이 제일 많고, 주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평균 1조원이 넘는데요. 회장 사재는 구조조정본부 정무팀에서 관리하고, 나는 감독하는 역할을 합니다.

십수년간 회장님을 가까이에서 모셨는데, 회장님이 1년의 절반을 해외에서 체류해 일일이 전화해 물어보기도 어렵고, 회장님이 '알아서 해라'는 묵시적 승인이 있습니다. 나 스스로가 회사와 회장님을 위한 것이라는 판단에서 (사재를) 사용해왔고, 회장님은 나를 신뢰해 왔습니다."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여야에 385억원이라는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됐던 이 본부장은 법정에서도 이건희 회장과의 연관을 극구 부인했다. 자신이 알아서 회사를 위해 이 회장 개인 돈을 썼다는 것이다. 결국 그해 9월 이 본부장은 징역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의 형을 선고 받았고,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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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2인자'의 97년과 2002년 대선 정치자금의 해법은?


그가 다시 9일 검찰에 나간다. 이번에는 작년과 사정이 사뭇 다르다. 97년 대선 불법정치자금 거래 내용이 담긴 불법도청 테이프 때문이다. 테이프에는 이 본부장 이외 홍석현 전 주미대사(중앙일보 회장)가 등장한다. 주목할 것은 이들 대화 속에 이건희 회장을 나타내는 대목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참여연대는 또 지난 98년 검찰이 세풍사건을 수사하면서 이회창 후보 진영으로 들어간 선거자금이 삼성그룹으로부터 나왔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를 종합하면, 97년 대선 당시 이건희 회장의 지시와 회삿돈 사용 여부가 이번 검찰 수사의 쟁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그동안 스스로 불법도청의 '피해자'라는 입장을 강조해온 삼성은 '그룹 2인자'의 전격 소환에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삼성 내부는 비상이 걸렸다.

삼성 관계자는 "과거 불법적인 도청으로 인해 회사가 유무형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고, 이같은 불법 도청에 대한 조사가 우선"이라며 "이 부회장도 피해자"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검찰 소환이 당혹스러운 것은 사실"이라며 구체적인 언급을 꺼리기도 했다.

이 본부장의 검찰 소환에 대한 삼성 내부의 충격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이 본부장이 삼성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특히 삼성 내부에서 스스로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부회장 뿐이라는 것은 정설이다.

이건희 회장에게 유일하게 직접 보고를 할 수 있고, 이 회장의 의중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삼성의 안방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 '이건희 회장의 그림자', '삼성 지킴이' 등이 그를 상징한다.

전직 삼성계열사 한 임원은 "삼성 내부에서 그는 단순한 구조조정 본부장 이상"이라며 "임원을 포함해 계열사 사장들조차 이 부회장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운다"고 전했다.

이학수 구조본부장이 이건희 삼성 회장과 함께 지난해 서울 신라호텔에서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을 만난 뒤 호텔을 나서고 있는 모습.
이학수 구조본부장이 이건희 삼성 회장과 함께 지난해 서울 신라호텔에서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을 만난 뒤 호텔을 나서고 있는 모습.이종호

이학수가 손펴면 삼성이 투자, 손쥐면 긴축정책

이 부회장이 삼성 가(家)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 71년 삼성그룹 공채12기로 입사하면서부터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마산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부산상고를 나온 그는 고려대 상과를 졸업하고 곧 삼성에 몸을 싣는다.

그의 첫 발령지는 제일모직 대구공장 경리과. 제일모직 경리과 라인은 일명 '삼성 인재 사관학교'로 불린다. 삼성그룹에서 웬만큼 잘 나가는 CEO 대부분은 제일모직 재무출신들이다. 이 곳을 거쳐 지금은 구조조정본부로 이름이 바뀐 삼성 비서실 근무가 최고의 엘리트 코스. 이 부회장은 이 코스를 그대로 밟았다.

82년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에 경영팀이 만들어지면서, 이 부회장은 당시 운영1팀장으로 발탁된다. 이후 비서실 재무팀 이사와 상무, 전무를 거치면서 삼성 재무통으로 성장했다. 삼성그룹에서는 '삼성 재무의 역사가 이학수의 역사'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20여년이 넘게 그룹의 돈줄을 관리해온 그는 이병철 전 회장을 비롯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상무(삼성전자)의 핵심 브레인 역할도 담당하게 된다. 또 이병철 전 회장에서 이건희 회장으로, 이건희에서 이재용 상무로 옮겨 가는 그룹 경영승계 과정의 지분관리에도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한 관계자는 "오래동안 한 분야에서 일하면서 한 집안과 인연을 맺은 것이 두터운 신뢰를 쌓는 초석이 됐을 것"이라며 "재계에선 '그가 손을 펴면 삼성이 투자를 하고, 그가 손을 쥐면 삼성이 긴축정책을 펴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삼성 가(家) 재산분할과 경영승계 과정에 깊숙이 관여

삼성이 '제2창업'을 선포했던 지난 95년. 이 본부장은 급히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장소는 LA 인근 모처. 그는 이건희 회장과 함께 삼성 가문의 가족회의에 참석했다. 이병철 전 회장이 생전에 삼성가 재산분할을 했음에도 95년 2월까지 형제들끼리 최종 타협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회의에는 이 전 회장의 장손 이재현 제일제당 상무(장남 이맹희씨 아들), 장녀 이인희 한솔제지 고문,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백화점 상무, 이건희 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른바 최후의 대협상이라 불리는 '삼성가의 빅딜' 현장에 이학수 당시 사장도 배석했다. 이 자리에서 신세계 그룹과 제일제당 그룹이 삼성에서 완전히 분리됐고,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와 물산, 엔지니어링, 중공업, 항공, 카드, 호텔신라 등 23개 계열사를 장악하게 됐다.

이는 이 본부장이 과거부터 얼마나 삼성 가로부터 신뢰를 받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또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얼마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지는 외환위기 상황에서 그의 행보를 보면 드러난다.

98년 당시 '삼성그룹의 종합사령탑'이라 불리는 구조조정본부를 이끈 이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전자와 금융업 외에는 어떤 회사를 처분해도 좋다"라는 허가를 받는다. 전자와 금융업을 빼고 이 본부장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그는 삼성자동차 퇴출 등 삼성 내 한계사업과 업종 전망이 불투명한 사업 부문에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또 그룹의 모든 역량을 현금 흐름의 정상화에 집중시켰고, 돈들이 그룹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지난해 2월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 본부장이 2002년 불법정치자금 제공 혐의에 대한 검찰 조사를 위해 대검에 출두하고 있는 모습.
지난해 2월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 본부장이 2002년 불법정치자금 제공 혐의에 대한 검찰 조사를 위해 대검에 출두하고 있는 모습.남소연

'이건희 그림자' '삼성 지킴이'... 이번에도 삼성 지킬까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학수 본부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삼성의 '철벽 수비수'로 불린다. '삼성 지킴이'라는 별명도 있다. 일부에선 '삼성 무대 뒤의 핵심', '이건희의 그림자'라는 말도 이어진다.

이 본부장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최근 수년새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삼성의 성과에 따른 것이다. 삼성 계열사의 한 임원은 "외환위기 이후 삼성이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사실 아니냐"며 "38년 창업 이후 98년까지 60년동안 삼성이 낸 이익보다 이학수가 구조조정본부장이 된 99년부터 5년간 낸 수익이 6배 정도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삼성그룹 인사는 "이 본부장의 집무실이 (삼성) 본관 최상층인 28층에 있다"면서 "그의 옆방이 이 회장의 방이다, 이 회장이 이 본부장을 얼마나 신뢰하고, 또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아니냐"고 설명했다.

이렇게 삼성가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아온 '삼성 지킴이'가 지난해 이어 오는 9일 검찰 앞에 다시 선다. 2002년 대선자금 수사와 법정에서도 철저히 이 회장의 연관성을 부인한 그였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이번엔 불법적인 도청테이프와 녹취록이긴 하지만, 97년 대선때 이 회장의 지시에 따라 여야 후보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이 부회장 자신의 육성이 담긴 증거가 있다. 또 회삿돈이 정치자금에 사용됐다는 검찰의 공소장 일부도 공개돼 있다.

'삼성 지킴이'가 이번에는 어떻게 이 회장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주군(主君)을 지킬 것인지 검찰 수사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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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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