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뭐해? 눈이 멀어 볼 수가 없는데"

어머니에게 '흥남'은 각별했습니다.

등록 2005.08.11 13:06수정 2005.08.1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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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흥남에 있는 비행기 만드는 공장에 다니셨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가져본 직장입니다. 당시 흥남은 공업도시였습니다. 흥남에는 질소비료공장과 다른 공장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하십니다.


"흥남에는 노동자들이 참 많았어. 노동자들이 사는 사택도 많았지. 사택이란 것들이 모두 코딱지만 했어. 너희 아버지도 사택에 살고 있었어. 여덟 호를 한 반으로 묶었어. 우리는 43호에 살았어. 너희 아버지 월급이 얼마였는지 아니? 100원이었어. 다른 노동자들은 60원밖에 받지를 못했어. 당시 100원은 큰돈이었어."

어머니는 100원이 얼마나 큰돈이었는지를 애써 강조하십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기 위해 고향인 충청도에 내려오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향에서는 100원짜리 지폐를 바꿀 곳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인근 도시에까지 나가서 100원 자리 지폐를 바꿨습니다. 그 돈으로 혼수를 치르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내 나이 그때 17살이었어. 너희 아버지는 29살이었지. 나는 1년 동안 시댁에서 살았어. 네 큰형을 낳고서야 나는 흥남으로 갈 수 있었어. 흥남에 가보니 너희 아버지께서 쓰신 일기장이 한 궤짝인 거야. 너희 아버지는 공장의 하루 하루를 글로 남겨놓았던 것이야."

어머니는 흥남 생활이 그렇게 좋았던 모양입니다. 흥남 얘기만 나오면 목소리부터 달라집니다. 목소리에 힘이 넘쳐 흐릅니다. 저도 덩달아 신이 납니다. 재미있는 대목에서는 손뼉도 칩니다. 그러다가 문득 녹음기 생각이 납니다. 저는 어머니 말씀을 녹음하기 위해 특별히 녹음기를 준비했습니다. 저는 녹음기를 확인합니다. 다행히 녹음기에 빨간 불이 켜져 있습니다. 녹음이 잘 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흥남에는 생선이 그렇게 흔하더구먼. 특히 명태가 좋았어. 그곳 사람들은 명태를 토막내지 않고 한 마리를 통째로 끓이는 거야.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 가을이면 명태 배를 따서 말리는 거야. 사방에 널려 있는 게 온통 명태뿐이었어."


어머니는 큰형을 들쳐업고 흥남 질소비료공장을 찾았다고 하십니다. 한푼이라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머니만 그렇게 공장을 찾은 게 아니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공장 앞에 줄을 섰습니다. 어머니는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젖먹이가 있는 여자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료공장이 그렇게 클 수가 없었어. 비료를 공장 빈터에 쌓아놨는데 마치 큰산 같았어. 하얀 눈이 수북하게 쌓인 큰산 말이야. 눈이 다 부실 정도였다니까."


해방을 목전에 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먼저 고향에 내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보기에도 그랬습니다. 분위기가 어수선했습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립니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붕붕 떠다닙니다. 일본사람들도 하나둘 흥남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말씀대로 먼저 고향에 내려옵니다. 1945년 7월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내려왔습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많은 시달림을 당했다고 합니다. 매일같이 크고 작은 행사에 동원되었습니다. 인민군에 들어오도록 강요를 당하기도 했답니다. 더 좋은 대우를 해줄 테니 공장에 남아 있으라는 회유도 받았답니다. 결국 아버지는 모든 걸 뿌리치고 남쪽 행을 결심합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어. 한끼 해결하기도 힘들었지. 고생, 참 지긋지긋하게 했어. 아이고, 불쌍한 우리 새끼들."

어머니가 제 얼굴을 쓸어 내립니다. 앞을 보지 못하시는 어머니입니다. 병으로 시력을 잃은 지 벌써 1년째입니다. 어머니의 삶은 척박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해방되고 나서 한번도 직장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로서는 그때가 가장 화려했는지도 모릅니다.

a 저희 어머니이십니다. 옆모습입니다.

저희 어머니이십니다. 옆모습입니다. ⓒ 박희우


아버지는 6·25 때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혐의로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3개월만에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평생을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고문으로 귀까지 먹었습니다. 온 몸이 망가져서 농사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그렇게 아끼던 재봉틀마저 팔아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모진 고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80평생을 가난과 싸웠습니다. 불구의 남편과 일곱 자식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17세에 시집 와서 18세에 흥남에 갔습니다. 20세에 시댁으로 돌아왔습니다. 30살의 꽃다운 나이에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전국 방방곡곡 장삿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삶은 이랬습니다.

저는 이쯤해서 녹음기를 껐습니다. 디지털카메라로 어머니의 옆모습을 찍었습니다. 저는 차마 어머니의 앞모습을 찍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눈먼 모습이 너무도 아프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보며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흥남에 찾아가라면 금방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다닥다닥 붙은 사택이 눈에 선해. 흥남 사람들, 참 친절했어. 대부분 죽었을 거야. 바다도 참 맑았어. 그런데 가면 뭐해? 눈이 멀어 볼 수가 없는데."

저는 목이 메어옴을 애써 참았습니다. 해방과 민족전쟁, 그 한가운데에 어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1978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에게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 아버지와 흥남에서 살 때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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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우리가족과 8.15> 응모작입니다.

덧붙이는 글 <우리가족과 8.15> 응모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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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수필을 즐겨 씁니다. 가끔씩은 소설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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