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세상’ 아이들 때문에 웃습니다

등록 2005.08.11 18:36수정 2005.08.11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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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텁지근한 날씨 탓인지 아내도 저도 무기력합니다. 아내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술 뜨고는 아무 말 없이 텔레비전 있는 작은 방으로 갑니다. 베란다에 서서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 저에게 딸아이가 놀아 달라고 졸라댑니다.


다른 날 같으면 "뭐 하고 놀까?"하면서 대꾸를 해 주련만 왠지 울적한 마음이 들어 엄마한테 가서 놀라고 하자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엄마가 있는 작은 방으로 갑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 불현듯이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딱히 무엇 때문이라고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의 끈을 따라가 보면 결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저를 비롯해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인 고통을 주지 않나 하는 생각에 이릅니다.

술 먹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왠지 술 한 잔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내한테 맥주 한 잔 하러 가자고 말하러 작은 방에 갑니다. 순간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그만 작은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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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텔레비전을 보는 것 같기는 한 데 어째 정신을 딴 데 두고 있는 것 같은 아내와 세린이의 저 표정, 이런 엄마와 누나가 아무 상관이 없는 듯 혼자서 장난감들을 이리 저리 방바닥에 펼쳐 놓고는 장난감들과 무언가 대화를 주고받고 태민이. 그냥 그 모습들이 저를 웃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맥주 먹으러 가자는 말 대신 카메라를 들고 와서 사진을 찍습니다. 세린이는 아빠가 뭔가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활짝 웃더니 거실로 뛰어 나갑니다. 무슨 대화를 그리도 열심히 하는 지 혼자서 장난감하고 대화를 하고 있는 태민이가 귀여워서 옆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는데 조금 후에 세린이가 작은 방으로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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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손에는 어느새 오렸는지 색종이가 가득 찬 장난감 그릇과 수저를 들고 옵니다.

"세린아 그게 뭐야?"
"음, 볶음밥이야 볶음밥. 장태민! 누나가 맛있는 볶음밥 만들어 줄게. 아빠 상 좀 갖다 주세요"


상을 갖다 달라는 말에 움직이기가 좀 귀찮기는 했지만 뭔가 재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상을 가져 다 주었습니다. 볶음밥은 잘 저어야 된다며 숟가락으로 뒤적뒤적 합니다. 태민이는 밥이라는 말에 장난감을 팽개치고 "정말 볶음밥인가?" 하는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누나 옆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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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다 됐다면서 먹자는 말에 태민이가 진짜로 색종이를 먹으려고 합니다. 설마 진짜로 볶음밥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세린이는 손으로 볶음밥(?)을 먹으려는 태민이에게 "밥은 숟가락으로 먹어야 한다"면서 훈계를 하고는 자기가 먹여 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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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둘은 뭐가 그리 웃긴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웃습니다. 맑고 경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후텁지근한 방 안의 공기와 저의 마음까지 상큼하게 확 바꾸어 놓습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에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아내는 아직도 무덤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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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볶음밥을 가지고 한참 동생과 장난을 치던 세린이가 이제는 "주먹밥"을 만든다고 합니다. 엄마가 가끔씩 만들어주던 주먹밥이 생각난 듯 합니다. 주먹밥 만들 때는 비닐장갑을 끼어야 한다면서 비닐장갑을 끼고는 제법 진지하게 주먹밥을 만듭니다. 딴에는 꽤나 정성을 들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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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주먹밥을 다 만든 세린이는 "완성!"하면서 승리의 V자를 그립니다. 그제야 아내도 이 상황에 재미를 느꼈는지 아이들의 음식놀이에 끼어듭니다. 그런데 어쩌죠? 태민이는 누나가 만든 주먹밥이 영 마음에 들지 않나 봅니다. 엄마가 주먹밥을 주자 고개를 돌려 외면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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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음식놀이가 끝이 났다 봅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놉니다. 한참을 잘 놀더니 세린이가 갑자가 "야!"하면서 태민이를 한 대 때립니다. 자기 장난감을 태민이가 가져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어째 안 싸우고 잘 논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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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누나한테 일격을 당한 장태민. 입을 삐쭉삐쭉 하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립니다. 저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다른 때 같으면 화를 냈을지 모르는데, 그 날은 왠지 아이들의 모든 행동이 귀엽게만 보여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웃으면서 지켜만 보았습니다. 아무도 달래주지 않자 태민이는 억울한지 엄마한테 가서 서럽게 울어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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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엄마가 동생인 태민이만 달래주자 세린이가 삐졌습니다. 어휴, 저 눈매 좀 보세요? 화가 단단히 난 모양입니다. 아마 그냥 내버려 두면 "엄마 미워! 태민이 미워!"하면서 금세 눈물이 쏟아질 겁니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세린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면서 웃음을 유도합니다. 방금 화난 표정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우리 세린이 예쁜 눈 지금처럼 밉게 뜨면 안돼요"했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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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아빠 말이 끝나자마자 아내가 "재 좀 봐"하면서 유쾌한 웃음을 터트립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태민이가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세린이에게 "눈 밉게 뜨면 안 된 다"고 한 말을 듣고는 아마 자기 딴에 미운 눈을 흉내 낸 것 같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아니었으면 힘든 세상속에 내 자신이 갇혀 며칠동안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힘든 세상"이지만 아이들 때문에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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