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의 시민사회를 고민할 차례다

마이클 에드워즈의 <시민사회>

등록 2005.08.12 07:13수정 2005.08.1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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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의 한국적 맥락

이제 '시민사회'는 고등학교 <공통사회> 교과서에도 등장할 만큼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는 개념이 되었다. 한국사회의 90년대 중반부터 한동안은 '시민사회의 전성기'라 불러도 무방한 시기였다. '참여연대'나 '경실련' 등의 시민단체들이 시민들로부터 높은 신뢰와 지지를 구축했고 <오마이뉴스>를 위시한 시민참여형태의 저널리즘이 기성언론 못지않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니게 됐다.


한국사회 진보의 주체가 '민중'에서 '시민'으로 급속히 전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시민사회'의 부상은 돋보였다. 그러나 새로운 진보운동의 동학으로 '시민사회'론을 추켜세우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다. 시민사회 내에는 진보적이지 않은 세력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a 진보, 보수로 시민사회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할 수 있다. 반북반핵을 외치는 극우 단체들도 나름은 '침묵하는 다수'의 자발적 결사를 표방한다.

진보, 보수로 시민사회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할 수 있다. 반북반핵을 외치는 극우 단체들도 나름은 '침묵하는 다수'의 자발적 결사를 표방한다. ⓒ 남소연

문화적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기윤실' 등의 기독교 운동 단체들도 그렇거니와, 신문 지면에 '김정일 반대' 대형광고를 끊임없이 싣는 극우 단체들도 나름대로는 '자발적인 시민 결사'로서의 자기 지분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시민사회'를 언급하는 사람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너무나 다양해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누구나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으로서나 대안으로써 '시민사회'를 언급한다. 이는 아직까지도 '시민사회'에 대한 명확한 개념규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기도 하다. 거품이 걷히면서 '시민사회'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시민사회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과정이자 목표"

a 마이클 에드워즈, <시민사회> 표지

마이클 에드워즈, <시민사회> 표지 ⓒ 동아시아

이 와중에 '시민사회' 논의의 교통정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반가운 책이 등장했다. 마이클 에드워즈의 <시민사회>는 이제까지 나온 시민사회 논의들을 정리하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과정이자 목표로써 '시민사회' 개념을 새로이 설정하고자 한다.


저자는 서로 통일될 수 없는 이념들과 애매한 정치적 수사로 점철된 '시민사회' 개념을 구출하기 위해 기존의 논의를 크게 세 가지 축으로 대별한다. ▲토크빌, 푸트남으로부터 비롯된 '자발적 결사체'로서의 시민사회론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홉스에 이르는 '좋은 사회'로서의 시민사회론 ▲하버마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합의와 토론의 '공공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론이 그것이다.

각각의 논의들은 저마다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자발적 결사체론'부터 살펴보면, 이 논의는 신뢰와 협동에 바탕을 둔 시민사회의 '자발적 결사체'가 안정된 민주주의의 토양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자발결사체는 국가의 중앙집중을 견제하고 사회의 다양성을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자발결사체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주장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공통된 합의를 도출해내는 데 한계가 있다.


여기서부터 '좋은 사회'로서의 시민사회론은 자발적 결사체들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이 논의는 사회가 이루어야 할 어떤 '문명화된' 가치로서 시민사회를 제시한다. 이 학파는 자칫 이기적인 이해의 주장으로 치닫기 쉬운 자발결사체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고 스스로 특권화를 경계하게 하는 의의가 있다.

그러나 '좋은 사회론' 역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론이나 '어떤 것이 좋은 사회인가'에 대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결여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공공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론'이 요청된다. '공공영역'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허물고, 실제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토론과 합의의 장이다.

저자는 시민사회 논의의 세 축 중에 어느 한 입장을 선택해 다른 입장을 비판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장점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통합적 접근을 제시하고자 한다. 각 논의들은 단독으로는 모두 불충분한 설명만을 제공한다. 그러나 각 논의의 장점이 합해질 때 그것의 설득력과 실현가능성은 매우 높아질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예컨대 '자발결사체'들은 신뢰와 협동이라는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자본을 구축한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한 '좋은 사회'의 나아갈 방향이 제시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공영역'의 토론과 합의라는 민주적 방식을 통해 실현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각각의 시민사회 논의가 만나서 일종의 시너지 효과 같은 것을 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공허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저자도 이를 의식한 듯 시민사회에 대한 이런 접근이 가능하기 위해서 '건강한 결사적 생태 체계'가 우선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의 참여를 구조적으로 제한하는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우리는 상황에 맞는 결사적 삶의 형태를 끊임없이 창안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시민사회를 고민할 차례다

저자는 여러 세력들의 합의와 협력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는 '협치(governance)'의 시대에 앞으로 '시민사회'의 역할이 보다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서구 선진국의 활동가인 저자의 논의를 바로 한국에 적용하기는 힘들겠지만 이제 '우리의 시민사회는 어떠한가'는 질문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자발적 결사'의 문화도 취약하고, '좋은 사회'에 대한 합의와 '공공영역'의 조정 과정도 전무한 한국적 맥락에서 에드워즈의 '시민사회'론은 그저 먼 곳의 이야기인 것은 아닌가?

'시민사회'가 어떤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는 '이념'이길 바라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에드워즈의 <시민사회>는 여전히 불충분하게 느껴질 것이다. 저자의 환경이 나아가야할 '좋은 사회'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루어진 선진국임에 반해, 한국의 시민사회는 아마 어떤 것이 '좋은 사회'인가에 대한 헤게모니 투쟁을 계속해야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a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촛불시위는 우리 시민사회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참여에도 제도정치와 시민사회간의 합의와 조정과정은 없었다.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촛불시위는 우리 시민사회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참여에도 제도정치와 시민사회간의 합의와 조정과정은 없었다. ⓒ 권우성

한국의 시민사회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들이 계속해서 던져져야 함은 분명하다. 문제는 합의와 조정이라는 '과정'으로서의 시민사회가 계속 무시되는 상황이다.

시민사회의 보수화 경향과 반동성에 대한 지적은 대개 옳다. 하지만 시민들을 계몽하고 선도해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강박이 시민사회를 자꾸 왜곡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제도정치에 대한 불신이 곧바로 시민사회에 대한 참여와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책은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8월의 읽을만한 책으로 선정되었다.

덧붙이는 글 이 책은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8월의 읽을만한 책으로 선정되었다.

시민사회 - 제3판

마이클 에드워즈 지음, 서유경 옮김,
명인문화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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